우리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중년 요양보호사 ‘나’는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평생 애썼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 훨씬 전에는 좋은 교사. 여기서 ‘좋다’는 사회에 순응한다는 말과 같다. 불평을 털어놓지 않고 어련히 옳은 방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느냐는 믿음으로 견디는 것. 그렇게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아온 나에게 두 가지 문제가 닥친다.
거칠게 나누어서 둘인 거지 사실 밑바닥에 깔린 원인은 다르지 않다. 딸의 여자 애인에 대한 문제, 그들이 부당함을 제기하는 비정규직 강사 부당해고 문제는 ‘세상 일’이다. 그리고 시설의 환자 중 한 명인 젠이 겪는 일은 ‘나의 일’이다. 아니, ‘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라고 대신 나서서 싸워야 할 일이다.
‘나’, 젠, 그린, 레인.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다. ‘나’가 그린에게 내려준 피는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고 모녀라는 얄팍한 관계로 끈질기게 이어진다. ‘나’는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고 그린은 사회가 규정한 울타리-벽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것은 옳지 않으니까. ‘나’는 부당한 일이 있다면 어련히 맞게 바뀌기 마련인데 그 일을 하필 왜 네가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린이, ‘그런 사람이 아니다’고 한다. 동성애자, 레즈비언, 성 소수자. 그렇게 명명하고 핍박받고 혐오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이 말은 딸의 성적 지향을 부정하는 문장만은 아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이 평생을 보낸 여자의 말로, 찾아오는 사람 없이 시설에 방치되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는 절규이기도 하다.
‘나’는 젠을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이 아니라 ‘젠’이라는- 한때는 사회에서 큰일을 하고 여기저기 베풀기도 한 고유한 존재로서 존중하려 애쓴다. 하지만 ‘나’에게 젠은 가족 하나 없이 청춘과 재산을 허비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젠의 현재가 딸의 미래가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나’가 두려워하는 건 딸이 동성 연인과 함께 ‘남편도 없이’ 사는 것 자체만은 아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하지 않은 미숙한 취급을 받으며 시설에서 신경안정제 따위를 맞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으로 죽는 것.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화자의 심정을 따라가고 있었다. 사랑은 여성과 남성 간의 결합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보수적’으로 설명하는 기성세대의 생각.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주장-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가해의 당위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화자의 공포는 생생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건 화자만의 공포가 아니라 나와 내 친구들의 고민이기도 했다. 몇몇은 철저하게 ‘비혼’을 선언했고 나를 포함한 몇몇은 ‘정말 잘 맞는 사람이 있으면 고민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비혼일 것 같아’라고 말한다.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면 또 모를까, 원 가족이 아닌 ‘생판 남’과 함께 법의 보호를 받을 방법이 결혼뿐인 세상에서-그것도 법적 성별이 달라야만 하는- 나와 친구들은 혼자 살아가는 삶을 기본값으로 둔다. 국가에서 신혼부부-기혼자 대상으로 펼치는 많은 정책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금을 마주하며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앞으로 바뀌지 않으면, 경제활동을 할 수 없을 때 내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부터 많은 사람과 연대하다 보면 스스로를 지키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