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기 Oct 06. 2019

야기하는 책_선량한 차별주의자

혼자 노오력하지 않아도 되는 곳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마. 네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어.’



10년 전 국민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학생 운동가였던 유경이 들은 말이다. 그 후 유경은 대기업의 아들과 결혼한 후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에게 말한다. ‘정말 내가 변하니까 세상이 변하더라고요.’


오래전 본 드라마라 대사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은 후 유경의 건조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를 배경으로 한 2010년 드라마지만 2020년을 목전에 둔 지금도 세상은 그런 믿음으로 굴러가는 것 같다.


세상 탓하지 말고 네가 열심히 해라. 그 유명한 노오력론이다. 이 말은 교묘하게 우리들의 일상에 파고들어서 얼핏 들으면 내가 겪는 고난의 원인은 전부 나의 나태함과 부족함이라고 자책하게 한다. 하지만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존엄을 포기해야 하는가? 


나 역시도 도태되지 않기 위해 일정을 테트리스처럼 끼워 맞추고 잠을 줄여가며 노오력하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이지, 

더 이상 절박하게 살고 싶지 않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청소년기까지 배제하고 분리하는 교육과정이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특수학급과 일반학급, 특수학교와 일반학교를 구분하는 게 모든 학생을 위한 선택이며 성적별로 수준별 수업을 짜는 게 효율적이라고 믿었다. 


학생의 특색에 따라 공간을 나누는 게 더 좋지 않나? 그 특색이 단순히 장애/비장애로, 79점과 80점으로 가를 수 있는 얄팍함이라도 그 편협한 구조가 최선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회는 약자에게 노력하라고 한다. 네가 더 노력하면, 네가 이 기준에 맞추면 우리도 너를 인정해줄게. 남성, 헤테로, 비장애인이라면 증명하지 않아도 될 것들, 어쩌면 아주 쉽게 넘을 수 있는 그들만의 기준을 따르라고 한다. 그 ‘기준’은 몹시 공명정대하여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다. 


‘장애를 극복한’, ‘유리천장을 깬’- 사회는 이들의 성공신화를 추켜세우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봐! 너희도 노력하면 이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올 수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밑바닥에서 그러고 있는 건 너희들이 부족해서야! 열심히 하기만 하면 이 사람들처럼 될 수 있는데. 불만만 가지지 말고!     



능력주의누구나 능력이 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     



이 희망찬 메시지가 약자를 더욱더 갉아먹고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귀를 막아준다. 대학서열화 뿐 아니라 학력차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몇 가지만 얘기해보자. 


나의 첫 직장은 준정부기관으로 다양한 대학 출신의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다양하다고 해봤자 국내 수도권 중심의 명문대 위주였지만. 여하튼 그들은 신입사원이 오면 대학 출신별로 모임을 가졌는데, ◇◇대 출신의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이 동문을 불러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식이다. 자세히는 모른다. 나는 고졸 전형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였으니까. 


학벌 차별, 학력 차별은 응당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네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안 했으니까, 거꾸로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까 이 차별-사내 카르텔, 취준 시 불이익, 사회적 시선-은 네가 불러일으킨 거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성적은 공정하다고 말하지만 그 과정이 정말 공정했나? 대학을 고르는 선택에 있어서, 학교에서 내신을 쌓고 입시를 준비하는 것에 있어서, 아니- 이 대학 중심의 거대한 성전에 대해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귄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대학을 다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건 우리가 대화하기에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자신이 아는 안타깝고 한심한 동창의 이야기를 하다가 ‘고졸이 무슨-’이라는 말을 썼다. 그 말은 ‘여하튼’이나 ‘몰라 근데’ 따위의 서두에 가까웠지만 난 그 뒤로 그 말에 웃을 수 없었다. 정신 차리고 가구 매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 앞에 왜 그 말을 붙여야 했을까.     


특권은 기회를 줄 것이고 그건 결국 능력이 된다. 나의 능력이 온전히 나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나와 당신의 노력과 능력은 얼마만큼의 특권이 포함되어 있을까. 


당신이 오늘 노오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던 사람과 당신 사이에는 몇 개의 계단이 있을까. 그리고 정말 죽을 각오로 노력하지 않았다 한들 그게 비난의 이유가 되는가? 노력하지 않으면 존엄을 지키고 문화를 향유하고 부당함에 맞서 싸울 권리를 가질 수 없나?     


나는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 열심히 세상에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작가의 이전글 야기하는 책_딸에 대하여(김혜진, 민음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