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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Oct 13. 2019

야기하는 책_탈코르셋:도래한 상상

당신이 생각하는 그 아름다움은 없다


        

나와 네 살 터울인 친동생 야자는 학교에 갈 때마다 꼬박꼬박 렌즈를 낀다. 잡티를 가리고 피부를 환하게 한 다음 눈썹을 그리고 틴트를 바르면 야자의 간단한 화장은 끝난다. 목적이 등교가 아니라 외출이라면 화장은 더 견고해진다. 눈동자는 밝아지고 속눈썹은 선명해지고 볼과 입술, 눈두덩이엔 음양이 조화로운 색이 얹어진다. 


우리 자매의 주 양육자인 엄마는 다른 가정에 비해선 그나마 우리의 외관에 무심하다. 당신부터 화장이란 립스틱을 바르는 게 고작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런 엄마도 ‘허벅지가 굵다’거나 ‘피부가 하야니 예쁘다’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이다. 청자는 딸이기도, 자매나 친구이기도, 이름만 아는 정도의 지인이기도 하다. 물론 엄마 스스로도 허벅지와 팔뚝에 붙은 살을 확인하며 ‘나이에 비해 늘씬한’ 체형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성형수술에는 비관적이지만 희고 고른 피부와 날씬한 몸을 미덕으로 치는 중년 여성.


그런 엄마와 엇비슷하게 자란 나와 달리 야자는 꾸밈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나보다 먼저 화장을 시작했고 얇고 하늘하늘하거나 어깨가 드러나고 달라붙는 디자인의 옷을 입고 다녔다.      


사회에서 찬양하는 뷰티와 거리가 먼 나와 달리 야자는 ‘예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과한 해석일 수 있지만 가끔은 야자가 지각이어도 고데기는 하고 렌즈는 끼고 나가는 게 그 ‘예쁘다’는 말 탓인 것 같다.


내 좁은 교유관계는 꾸밈에 관심 있는 애들이 한두 명에 불과했고 학교에서 민낯이더라도 소수가 되지는 않지만 지금 야자가 다니는 교실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삭막한 사이라 물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뷰티 유튜버가 성행하거나 ‘예쁜 몸무게’가 교리처럼 돌아다니지 않았어도 야자는 매일 붓기를 빼는 차를 마시고 꼬박꼬박 화장을 수정하며 다녔을까?     

     



탈코르셋이 이슈로 떠오르면서 나는 ‘꾸밈의 역사’를 돌이켜 볼 수밖에 없었다. 사회에서 규정한 여성성과 외모지상주의라는 포괄적인 단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까다로운 미의 기준. 침대를 기준으로 크면 다리를 자르고 작으면 다리를 늘리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다른 점이라면 지나가는 사람의 다리를 죄다 자르거나 늘렸던 신화 속 악인과 달리 지금 사회에서 그 침대에 눕혀지는 건 여성뿐이라는 거다.


그 규범에 비교적 무신경했던 나조차 회사에 들어간 이후 화장품을 하나하나 사 모으고 한번 쓰고 말 마스카라와 아이섀도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입사에서 퇴사까지 이년 반의 시간 동안 화장을 한 횟수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립스틱을 제외하고- 그 외 약속이 있을 때는 이따금 안경을 벗고 화장을 했다. 


그러기를 몇 번 나는 렌즈와 화장을 차례로 그만두었다. 넣기도 빼기도 힘든 렌즈는 쉽게 돌아가는 데다 난시인 내가 괴로울 정도로 제대로 된 초점을 잡지 못했고 두통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피부화장이야 말해 무엇하랴, 얼굴에 손만 대도 묻어나는 살구색 찌꺼기는 한 번이라도 피부에 무언가를 덧대어 보았다면 알 것이다. 


꾸밀 자유와 꾸미지 않을 자유가 불균형한 21세기에, ‘어떻게 꾸미느냐’가 아닌 ‘왜 꾸미느냐’는 중요한 질문이다. 번화가에 줄줄이 이어진 로드샵과 성형외과, 주제에 상관없이 앞다투어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을 내세우는 미디어 틈에서 이 꾸밈이 내가 진정 원했는지 수순처럼 홀린 건지 가름하기는 힘들다. 


다만 공들여 해왔던 행위의 의미와 그에 미칠 파장을 파악하는 건 필연일 수밖에 없다. ‘커리어우먼’의 이미지가 하이힐에 펜슬스커트 차림으로 당당하게 걷는 모습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가 선망했던 게 무엇인지 지금이라도 알아야 하니까.     



여전히 나는 어떤 차림을 하건 그것이 차별의 당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화려한 치마를 입거나 품이 큰 티셔츠를 입거나 짧은 원피스를 입거나 그 자체가 비난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특정한 성별로 보이는 이들에게만 옷차림을 제한하는 사회가 건강할까? 정부와 기업이 조장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규정된 여성성을 따르지 않으면 조직에서 불이익을 받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자신을 돌아보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을 거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따라왔던 그 아름다움에 의문을 표한 적 있다면 한번은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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