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기하는 책_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지음)
나는 외로웠다. 겁이 났고 쓸쓸했고 무서웠다. 나의 증상에-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메스꺼워지는 등의- 이름이 붙여졌을 땐 개운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게 아니면 그럴 리가 없지.
별거 아니라는 말은 야속했고 어떡하냐는 걱정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주로 화가 나거나 외로웠다. 대수롭지 않은 태도도 호들갑스러운 안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절한 대처가 있었을까,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이십 대의 앞에는 ‘한창’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그래서 ‘아직 이십 대인데’라거나 ‘이십 대 때 멀쩡해도 그 뒤로는-’이라는 가정, ‘아무렴 이십 대인데’라는 인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내가 아픈 후로,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뒤 살아가고 있는 그 과정을 다른 이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수술 사실을 밝히면 잠시 달라지는 대화의 온도나 중심이 떨떠름했다. 목에 난 흉터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흉터 위로 붙인 밴드를 보고 ‘왜 그렇게 된 거냐’는 질문으로 연결될 질문들이 피곤했다.
수술 직전에 갑상선 수술 후기 만화를 읽었다. 유쾌하게 그려낸 만화를 보니 기분이 나아졌다. 수술이 끝난 후 목을 돌리거나 누울 때마다 아팠다. 이런 시발. 거의 한 달 동안 조심스레 누웠고 발레 학원에 가지 못했다. 수술이 끝나고 한 달 뒤에 해외여행을 갔다.
쉽게 숨이 찼고 심장은 너무 빨리 뛰었으며 한 끼만 걸러도 머리가 아찔했다. 반이나 날아간 갑상선 탓인지 다른 부작용인지 합병증 비슷한 건지 새로운 병인지 ‘심인성 질환’으로 치부될 수 있는 유인지도 몰랐다. ‘심장이 가쁜 이건- 부정맥인가?!’하는 드립은 전혀 웃기지 않았고 ‘우리 자연사하자’는 구호도 아득하게 들렸다. 다른 나라였으니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길게 외국으로 가는 것도 잘 생각해 봐야겠구나, 막연히 워홀을 계획하며 짬짬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맥이 빠졌다.
잘 먹고 잘 자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스트레스 안 받고. 한국에서 가능하긴 한가? 저걸 다 지키면 안 아프긴 한 거고?
수술한 지는 반년이 조금 안 됐다. 여전히 내 몸은 자주 고장이 난다. 그때마다 병원을 가고 싶지만 망설이는 건 첫째로 돈이 없었고 둘째로 (돈을 받아야 하는)엄마의 눈치가 보이며 셋째로 내가 유난일까 봐, 였다. 내 몸은 분명하게 신호를 주고 있는데도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다.
‘아팠던 때’는 어떤, 과거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때때로 괜찮은 듯도 하고 종종 아프다. 그냥 아프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컨디션이 괜찮으면 밤늦게 컴퓨터를 하고 책을 읽다가도 어떤 날은 얼마 걷지 않았는데 숨을 깊게 내쉬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회사에 다니지 않기에 가능한 생활이다. 아프면 쉴 수라도 있는 환경.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감각을 모른다. 온종일 내 몸의 눈치를 보면서 불안을 불안해하는 것. 누구의 잘못이 아니지만 나는 외로웠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지난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노동량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그때 당시에 몸과 마음을 갈았던 것을 차치하고- 그때와, 곧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고, 할 수 없고 응하고 싶지도 않은 지금에 대해.
사회는 여전히 우리에게 정상적일 것을 강요한다. 아니, ‘정상이 아님’을 상상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너는 당연히 이만큼의 몫을 해내야 하고, 그렇지 못해서 도태되고 낙오되는 것은 너의 탓이라고. 더 ‘힘내서’ 네 자리를 네가 차지하지 하는데,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으면 네가 감당해야 한다고.
나는 힘내고 싶지 않다. 그냥 살고 싶다. 악착같이, 아득바득 처절하게 노력하지 않아도, ‘아픈 몸을 이끌고 누구보다 열심히’ 애쓰지 않아도, 삼시 세끼 꼬박꼬박 먹으면서 쉴 땐 쉬고 일할 수 있는 만큼 일하면서 살고 싶다.
내 몸과 미래를 이야기할 때는 희망으로 맺는 문장이 많아진다. ‘-싶다’가 당연해지는 날이 왔으면- 하고 또 희망으로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