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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Dec 09. 2019

우리들의 공간

2019 한국여성민우회 송년회 후기


“안녕하세요.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야기’입니다.”


이렇게 나를 소개하는 게 좋았다. 내가 몇 살이고 무엇을 하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선입견이 덧씌워지는 정보-대학을 가지 않았고, 하는 일 없이 쉬고 있으며 여름에 수술을 받았다는 등의-는 내가 자의로 말할 때만 힘을 얻고 말로써 전달된다. 타인에 의해 떠밀리듯이 나의 신상을 털어놓고 얼떨떨하게 동정받거나 변명할 필요 없이.     


송년회는 안전하고 따뜻했다. 밖에서는 편견이 되는 나의 특징들은 단순한 사실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다. ‘다름’을 결함이나 계급으로 해석하지 않고 모두가 각기 다른 인간들로 있으며 그 자체가 존중되는 곳이었다. 


얼어붙은 서울의 저녁을 걸으면서 괜히 간다고 했나, 싶기도 했다. 지방에 사는 나에게 서울은 너무 멀었고 그곳의 다양한 인프라와 프로그램은 더 멀었다. 하지만 2019년 막바지의 나는 누군가를 단호하게 지우는 목소리들에 질려 있었다. ‘우리 대화를 해보자. 물론 내가 맞고 네가 틀렸지만’이 유머가 아닌 신념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과 있을 때의 허탈함과 막막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한 번의 모임-모임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취미, 그 무엇이라도-이 구원이나 탈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다정하고 민감한 사람들이 이곳에, 어딘가에는 있음을 확인하는 건 중요했다.


우연으로 만난 사람들과 올해 가장 힘들었던 일이 뭔지, 내년 버킷리스트는 뭔지 따위를 공유하고, 점수가 적힌 분홍 종이를 찾고 속담을 맞추고 선물을 교환하고,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여길까 의식하지 않고 유쾌하게 놀았다. 황당하고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짜 좋아서 웃음이 터지고야 마는 감각을 만끽하며.     


내 이름 ‘야기’는 ‘이야기’이면서 ‘야기하다’이기도 하다. 일이나 사건 따위를 끌어 일으키는, 그것들을 계속 말하는 사람. 

글을 쓰는 걸 좋아해요, 소설이나 수필을 써요. 요즘엔 잘 안 쓰지만……. 누군가 가벼운 질문만 해도 두서없이 주절거리고는 돌아가는 길에야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는지 되짚게 되었다. 인간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나와 비슷한 온도의 사람들-같은 주제에 화내고 비슷한 지점에 고개를 끄덕이는-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새삼 깨달았다.      


전철 시간에 늦지 않게 얼어붙은 거리를 다시 가로지르면서, 촛불을 들고 다니며 모서리에 빛을 옮기는 사람들에게 받은 느슨한 위로를 가지고 올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새로 쓸 이야기가 생각났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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