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가부장제가 불편하다
왜 사과 못 깎는 걸 걱정했을까?
이제 우리는 안다. 사과를 최대한 덜어내지 않고 얇게 깎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걸. 나는 중학생 때 ‘장 하나 못 담가서 어떡하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간장 종지를 만들어야 했나?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명절에 거드는 일 없이 펴진 상 앞에 앉아있던 남자 친척은 내가 간장 종지를 못 만든다고 하자 그렇게 말했다.
‘시집가서 어떻게 하냐’는 무례한 ‘걱정’에 결혼 안 하니까 상관없다고, 그리고 필요한 건 사 먹을 거라고 대꾸했다. 그 덕분에 어른 앞에서 얌전히 굴지 않는 까칠하고 버릇없는 애가 됐지만 그들의 평가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었으니까. 다만 엄마가 ‘친척들 앞에서 엄마 부끄럽게 하지 마라’는 말은 많이 아팠다.
책에서 말한 ‘사과’와 ‘간장 종지’는 다르지 않다. 못하거나 서툴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으로 학습되어온 사람들은 하등 쓸모없는 염려를 하도록 교육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팔자 좋은’ 여자가 심심해서 적은 불평불만으로 치부할 거다. ‘그 정도로 뭘’,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등 여성의 이야기는 무수히 개인의 성격 등 따위 ‘사적인’ 일로 축소되어 왔으니까.
“직설적으로 불편을 말하는 건 당신들에 대한 도전이고 비난이고 공격이라 여긴다.”
기혼 여성-며느리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의 기록이었지만 사회에서 낮은 계급의 여성-하대하는 게 마땅한 여성으로 존재할 때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다양한 층위에 따라 각자 다른 차별을 견뎌왔겠지만, 사소하고 관습적으로-촘촘하고 착취적으로 유지된 가부장제 속 피해자라는 큰 줄기를 타고 있다.
며느리가 시가를 향해 자신의 의견-정확히는 그들에게 순응하지 않는 게 비합리적으로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생이 교사에게,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조카가 삼촌에게 명확히 의견을 전달하는 건 권위에 의한 도전이 된다. 어째서 권위가 발생해야 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람은 ‘부드럽게’, ‘현명하게’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다름’과 ‘아님’을 듣고 싶지 않아 한다.
“똑똑한 며느리의 반대는 똑똑하지 않은 며느리가 아니라 착한 며느리다.”
‘며느리’가 노력하는 만큼, 여성에게 지워진 무게만큼, 뭐라도 맡겨둔 것처럼 요구하는 만큼 사위-남성에게 요구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너무나 분명하게 존재한 걸 ‘성별의 다름’으로 간단히 치워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20세기로 돌아가 주던가. 그들에겐 2020년이라는 거창한 미래 도시다운 세계가 과분하다.
세상은 정말, 말하는 여자 /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불쾌한 건 불쾌하다고 하는 여자 / 참지 않는 여자를 싫어하고 미워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처럼 그런 여자들을 꺼리고 미워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다. 나는 그런 여자였고, 그런 여자일 거고, 감추지 않는 여자들을 아끼고 지지할 거다. 그러길 멈추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