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페미니즘; 우리는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나요?
알고 있지만 외면하는 것들이 있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이나 새 부리에 꿰인 플라스틱 빨대, 여름에 춥고 겨울에 더울 만큼 돌리는 냉난방기 따위. 삼겹살을 굽고 일회용 컵에 음료를 담아 마시는 건 빠르고 간단하다. 텀블러를 씻고 말리거나 상하기 전에 채소를 조리하고 먹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지구와 환경이란 말은 과하게 거창하고 멀어 보인다. 해외로 가지 않는 한 내 국적을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지구를 벗어나지 않아서 내가 발붙인 행성의 생태를 무시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과학의 발전과 생태계의 파괴가 정비례한다고 믿으면서도 그 ‘생태계’에서 인간은 빠져나갈 수 있는 양, 예외적인 존재인 것처럼 무심하게 굴기도 한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종이를 낭비하고 음식물을 남기고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한다.
비약적으로 성장한 문명의 혜택으로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반나절도 안 되어 서울에서 제주까지 갈 수 있다. 그렇게 쭉쭉 나아가면서 분명 잊거나 잃은 것들이 있을 텐데 우리는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분명히 배우지 않는다. 아니면 과민한 사람들이나 신경 쓰는 일로 치부하거나.
‘신경 쓰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시간과 돈, 에너지를 할애하기엔 우리의 삶은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고 환경이니 지구의 미래니 하는 말은 고민 없는 사람이나 하는 고민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각자가 딛고 움직이는 공간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 바로, 느리고 끈질기게.
#1. 다시 생각하다, 처음인 것처럼. ‘덜 쓰고, 다시 쓰고, 안 쓰는’
일회용 컵의 5%만 재활용되고 나머지는 소각‧매립된다. 플라스틱 빨대의 재활용은 0%다. 지름 5mm 이하의 미세 플라스틱은 강이나 바다로 흘러서 돌고 돌아 인간의 밥상에 오르고 미세먼지가 되어 인간의 호흡기에 스며든다.
우리는 미세먼지를 피하고자 일회용 마스크를 끼고 목에 좋은 차를 마시면서 종이컵에 음료를 테이크아웃하고 배달음식을 주문한다. 돈과 시간과 체력이 없는 만큼. 해수면이 오르면 가장 낮은 곳부터 덮는 것처럼 인재(人災)는 가난으로 향한다.
#2. 규격 외 몸, 소비의 전장
몸이 소비의 대상이 되면 ‘사야 할 것’은 ‘고쳐야 할 것’으로 환산된다. 「~다운 차림새」는 복장뿐 아니라 행동도 제약한다. 호탕하지 않은 웃음, 너무 활기차지 않은 손짓, 과장되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미소.
사회에서 규정한 ‘미’를 따르지 않은 여성을 비난하면서 ‘미’를 따르려 노력하는 여성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유두, 무릎, 혀, 팔꿈치 색이 진하지 않은 핑크여야 한다. 여성병원을 알아보면 미용이 목적인 소음순 수술을 광고한다. 여성은 성기까지 예쁠 것을 요구하는 세상에는 먹으러 간 식당이나 카페에 ‘먹을 때가 제일 예뻐’라는 분홍 네온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살이 쪘네 빠졌네 따위의 코멘트는 선의와 관심으로 포장된다.
여성의 몸은 보이는 대상으로만, 입을 가리고 웃으며 사뿐사뿐 걸으며 붉은 뺨과 입술을 가진 이로만 존재한다. 마네킹을 선망하도록 학습되면서.
얼마 전 한 친구는 대한민국의 천편일률적인 여성복 사이즈를 토로하며 말했다. ‘그거 알아? 옷가게에 있는 마네킹 보니까 입혀둔 옷이 옷핀에 집혀 있더라. 그러니까 실제로 입으면 그 핏이 나올 리가 없지.’ 여성은 실존하지 않는, 실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쟁취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정혈하지 않은 것처럼, 아프지 않은 것처럼, 「표준의 몸」처럼 보여야 한다. 누구처럼? 아프지 않은-비장애인-성인-남성, 가능성 유무를 떠나서-떠날 수 없는 문제이지만- 내가 나로 살아가는 게, ‘나는 이렇다’고 말하는 게 어리석고 철없는 짓으로 치부되는 문화가 지긋지긋하다.
#3.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본주의는 효율과 비효율을 가름한다. 가치로 매길 수 없다는 말은 허울 좋은 말이 될 뿐, 누군가의 인격, 노동량, 비인간동물의 존재는 타자에 의해 가치 절하 되어 정의된다. 소비는 (내가 가진 문제, 구조가 만든 문제 따위의)해결로 이어진다고 믿게 한다.
우울할 때 산 물건들은 배송이 되기도 전에 더 깊은 우울감을 선사한다. 내가 이걸 왜 샀지, 돈도 없는데. 안 사면 견딜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좁은 방의 지분을 차지하는 것 외의 변화는 없다. 오히려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인 것에 돈을 썼다는 불쾌함이 자라난다.
후회하며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아는 만큼은 똑똑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적어도 나는 늘 그랬다.
#4. 에코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또는 생태주의 한쪽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현재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남성경제”이며 “여성의 가사노동, 돌봄 노동은 경제학에 포함되지도 않”는 점을 지적한다.
남성경제가 만든 ‘권력’을 탈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구조 자체를 무너트리고 다시 정립한다. 갑과 을의 우열을 가리는 게 아니라 우열 자체를 없앤다.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위에 설 수 없다.
점점 불편해진다. 학원 정수기 옆에 쌓인 종이컵들과 낱개로 종이상자 안에 낱개로 비닐 포장된 과자들, 카페에서 꽂아 주는 플라스틱 빨대 따위. 물론 이걸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많은 것들-규칙적이고 건강한 식단을 만들고 먹을 수 있는 시간과 돈, 많은 사람이 ‘유난하다’고 하는 사람이 될 용기, 혹은 그러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할 수 있는 행운 등-을 포기해야 하니까.
‘지속가능’이라는 말은 회사 임원이 외치는 ‘혁신’만큼 허무맹랑하고 우습게 들렸다. 좋은 의미의 말들이 곱씹음 없이 내뱉으면 퇴색되고 만다. 쉽고 가볍고 별거 아닌 것처럼.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무해하게 살고 싶다. 불가능한 걸 알기에 더 조심스럽고 부드럽고 단단하게.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나요? 이제 대답을 만들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