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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Feb 05. 2019

명절, 도망가면 왜 안 돼?

선입니다, 존중하세요

         

민족 대명절인 설이다. 어렸을 땐 용돈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고, 친척 간의 왕래가 없을 땐 아쉬웠으며 회사에 들어간 후부터 간만의 연휴로써 반겼다. 우리 집은 친척 간의 교류가 얕은 편인데도 명절마다 찾아오는 가족이 있는데, 관계로 따지자면 아빠의 동생네였지만 나에겐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가족이 남이냐’며 야단을 치던 아빠에게 일찍이 ‘나 아니면 남이지’하고 대꾸한 나에게 핏줄을 이유로 고유의 영역에 쉽게 발을 들이미는 유형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너무나 쉽게 나의 진로를 폄하했고, 내 선택을 무시했으며 내 성격을 비난해왔다. 본인은 누워있으면서 나서서 차례 준비를 돕지 않는 나에게 ‘나이가 몇인데’라며 투덜거렸고 제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대답하자 ‘쟤 저래서 형수 노후에 모르는 척하겠다’고 말할 만큼 무례했다. 오랜 시간 나를 깎아내린 사람을 ‘같은 식구’라는 명목으로 함께 해야 했으며, 나이를 내세워 침묵을 강요했다.     




예전 얘기를 하자면, 친척 사이에 난 예의범절의 반동분자였다. 조부가 시키는 대로 애교를 떨거나 노래를 부르며 재롱을 부리지 않았고, 아빠의 형제들이 하는 조언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으니까. 아니다 싶은 말은 반박해야 했고 어른이 말할 때 그저 ‘네’하고 앉아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언제나 올바른 주장을 해왔다고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거나 반론하지 못한 채, 살아온 세월을 이유로 무작정 나를 건방진 것으로 치부하며 눈을 부라리는 건 성숙한 태도였을까?     


조금 더 뒤의 얘기를 해보자.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친척이 유난히 많이 왔던 해였는데, 남의 말이라곤 들을 생각이 없는 친척들이 내 공간을 점령하는 걸 꼼짝없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난 처음으로 무언가에 빠져 한창 덕질을 하고 있었는데, 공부방 책장에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린 종이를 붙여두곤 했었다. 


짐작하겠지만 내 그림은 손 쓸 수 없게 낙서투성이가 되었고, 불행히도 그 사실은 그들이 떠난 뒤 발견했다. 엄마는 ‘그러니 잘 보관했어야지’라며 일축했다. 세상에, 아이들의 행동보다 나의 처신을 탓하는 대응에 터진 화를 주체할 만큼 나는 온화하지 못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욕을 하며 넝마가 된 종이를 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내가 무수한 명절 중 5년 전 추석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절을 나느라 힘들었던 모양인지 엄마는 혼자 울분을 토하는 나에게 화를 내었다. 레퍼토리는 과거에 듣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 그냥 덮고 넘어가도 될 일을.     




천진했던 시절, 엄마는 나의 가장 큰 이해자였다. 이부자리에 누워 엄마와 밤새 수다를 떨던 시간과 학교에 다녀온 나를 끌어안아 주던 온기는 여전히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모양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핀트가 어긋나는’ 부분이 커져만 갔는데, 가장 확실하게 보였던 건- 나는 엄마처럼 무리의 평화를 위해 침묵을 감내하는 사람이 아니었단 거다. 엄마는 어른들이 화낼 걸 알면서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은 고집을, 교류가 없는 친척 동생을 감싸주지 않는 무뚝뚝함을 못 마땅히 여겨왔다.      


이런 마찰은 여전히 빚어지고 있는데, 그들도 나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을 마주해야 하는 명절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빈손으로 와서 내 말투와 태도 하나하나 흠잡는 아빠의 동생은 상상만으로도 내게 스트레스를 안겨주었으며, 한때는 명절 휴일 근무를 고려할 만큼 기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단절을 간절히 바랐으나 세대주와 의견이 다른 세대원은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게 다였다. 그들은 나를 존중하지 않았고, 엄마는 그들에게 상처받은 나보다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나를 먼저 보았기 때문에 유년의 그을음은 여전히 덮을 수 없었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쌓여온 응어리 진 마음을 들은 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남도 아니고’라는 말을 했으며, 여전히 명절마다 그들을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도망치자. 여행을 가거나 친구 자취방으로 피신을 하거나. 내 소유물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집에 있다고 해서 그들이 내 것을 제 물건처럼 만지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거실 책장을 테이프로 감싸둔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설은 그들이 시골로 갔기에 내 계획은 옮길 필요가 없었지만, 대안이 있다는 것만으로 안전함을 느꼈다.     


도망. 엄마를 설득하길 포기한 2019년은 갈등에 맞서는 게 아닌 그 상황 자체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나는 올해, 양육자였던- 아직은 나를 일부 보호해주고 있으며 유년 시절 가장 좋은 친구였던 40대 후반의 여성에게 기대하기를 멈췄다. 

나와 엄마의 관점이, 사상이, 시야가 같을 수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해도 엄마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는 언어가 있다는 걸 인정하자 드디어 후련해졌고, 어쩐지 슬퍼졌다. 오랜 친구와 이별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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