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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Feb 23. 2019

나의 생리 이야기

터부시하는 것의 시간들

        

나는 또래에 비해 발육이 늦은 편이었다. 안경을 처음 쓴 아홉 살 이후로 책상 맨 앞줄에 앉지 않은 때가 없었고, 교복을 입은 뒤에도 초등학생으로 보였다.


생리도 마찬가지였다.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아도 티 나지 않는 가슴처럼 생리 주기만 되면 욕을 하는 친구들을 공감할 수 없는 건 미성숙의 상징이었다. 내가 스스로 새긴 무언의 결핍이었던 거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겨울방학에 생리를 시작했다. (아마) 친척 집의 변기에서 붉은 기를 보고는 오줌에 피가 섞인 줄 알고 핸드폰으로 혈뇨, 혈뇨 원인 따위를 검색하며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돌아와 팬티에 흥건하게 묻은 검붉은 피를 보고서야 이게 책에서 보던 월경이구나-를 알았다. 엄마는 생리대 붙이는 법과 버리는 법을 알려주었고 나는 지금은 지긋지긋한 이 생리를 기묘한 마음으로 반겼다. 어린 나에겐 ‘보통 성장’에 적합한 퀘스트를 하나 해결한 것이었다.     




그간 읽었던 학습 만화나 소설에서는 생리대를 터부시했다. 엄마가 될 수 있는 축복이라고 훈훈하게 마무리하면서 남들에게 생리대를 숨기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묘사되었다. 당시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조심스레 생리대 파우치에 생리대를 넣어 다녔고, 생리대를 빌려줄 때는 비밀 작전을 펼치는 것처럼 은근하게 친구의 손에 건넸다. ‘그날’이라고 비밀스럽게 부르는 것보다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부끄러움’을 당연시하게 했다.     


늘 엄마가 쌓아둔 생리대만 쓰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내 생리대를 스스로 고를 기회를 맞았다. 생리대에 유해물질이 포함되었다는 게 한창 이슈가 되었던 때였던 것 같다. 인체에 해로운 성분이 있다는 게 알려졌지만 그 무수한 브랜드는 여전히 매장에서 쉽게 발견되었다. 평소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남들보다 생리 전 증후군이나 생리통이 없는 편이었지만 쉽게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환경(이게 다 회사 때문이다)에서 몸은 천천히, 확실하게 조져졌다. ××




생리컵과 탐폰. 생리대를 대체할만한 것들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블로그와 SNS에는 생리컵 공구와 사용법, 브랜드 비교, 나만의 골든컵 찾기 등의 글이 계속해서 올려졌다. 수많은 간증 후기를 보며 구매 욕구를 다졌지만, 나도 모르는 내 질의 길이를 재서 안 맞을지도 모르는 생리컵을 집어 넣어보며 내게 적합한 생리컵을 찾는 게 무서워졌다.


그래서 생리컵보다는 대중화가 되었지만 신경도 안 썼던 탐폰으로 눈을 돌렸다. 마침 지독한 생리통을 겪고 예전부터 탐폰을 쓰던 친구가 있었는데, 자신이 썼던 두 개의 탐폰을 추천하며 생리대의 단점을 읊어주었으나 ‘난 처음부터 탐폰 천재여서 넣을 때 안 힘들었어’라고 말해 나를 좌절하게 했다. 왜냐고?


오래 사용했다간 독소 때문에 쇼크가 올 수도 있다, 넣으면 진짜 아프다 따위의 후기를 접해왔으니까. 그리고 난 심각한 쫄보였다. 아니면 아직도 ‘처녀막이 찢어질 수 있다’는 경고문을 붙여두는 의료업계의 모습에 학습되어왔기 때문일 수도. 처녀막의 허상을 믿는 게 아니라, 아직 병원에서 내게 맞는 생리컵을 추천받을 수 없는 현실이 슬프단 말이다.     




겁 많은 내가 할 수 있는 차선책은 해외 브랜드로 눈을 돌리는 거였다. 원래 쓰던 것보다 비쌌지만 얇고 편했다. 몇 달 후 유해성분이 발견됐단 글을 보기 전까진 애용했다.


그다음엔 SNS에서 추천하던 일본의 생리대를 샀다. 예전에 쓰던 것보다 두툼해서 그다지 편하진 않았지만 가격이 저렴해 계속 사용했었다. 하지만 ‘난 생리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서 만족스럽진 않았다.


본가로 돌아온 후 급하게 생리대를 써야 했을 때 SNS에서 유명했던 제품을 골랐다. 올리브영에서 팔았는데, 마침 세일 중이었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싼 데다 얇았다. 유기농이기까지 해서 앞으로 이걸로 정착할까? 했다.


그러다 여성 CEO가 운영한다는 국내 생리대 브랜드를 떠올렸다. 팟캐스트에서 여성 작가와 사업가를 소개하는 회차였는데 트위터 계정과 홈페이지에는 수백 명의 간증이 폭발했다. 마침 이 브랜드를 써보고 싶었고, 정기 배송도 된다고 해서 체험팩 없이 바로 정기 배송을 신청했다. 원래 이렇게 즉흥적으로 사는 편이다.


유기농이었고, 얇았고, 과장 조금 해서 안 붙인 것 같았다. 급하게 엄마가 사둔 생리대를 썼을 때의 불쾌감은 전혀 없었고, 겉면의 테이프도 쫀쫀해서 다 쓴 생리대를 말아 붙일 때 갑자기 펼쳐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생리대 때문에 기분 나빠하지 않은 생리 기간을 거치면서 몸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몸. 보이지 않는 나의 몸


나는 1년 전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리 불순으로 여성병원에 가서 알게 된 진단명이었다. 처음 간 여성병원과 다음으로 간 한의원에선 불임의 위험을 중점으로 설명했지만 난 호르몬 이상과 그에 따른 질병이 걱정되어 한약을 처방받았다. 어쨌거나 건강한 게 좋으니까.

  

겉으로 보이는 몸은 부위 하나하나 조각내어 품평하면서 속의 몸은 무시했다. 아파서 체중이 감소했을 때 그래도 날씬해졌네- 하고 좋아하는 꼴이다. 자책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학습되어 왔으니까. 그래서 차근차근 바뀌려 노력하니까. 


오늘도 나는 내 몸을 들여다본다. 살갗 아래로 드러나지 않을 부위를. 아주 느긋하게, 아주 세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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