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달은 우리가 녀석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자 많은 것들이 변하기 전의 큰 지진이 오기 전 작은 지진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처음 아기라는 게 진짜 이렇게 어렵게 얻게 되는 것을 몰랐던 우리 가족에게서 아내는 병원까지 다니며 노력을 하고 있었으나 영 반응이 없는 차였다. 그러다가 그 노력마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으니 하필이면 젖은 눈이 내리던 고속도로 위에서 아내가 운전하던 차가 미끄러져 벽에 부딪친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겪은 첫 대형사고였다. 당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나는 황급히 고속도로로 달려갔는데 다행히 주변에 다른 차도 없었고 아내도 무사해 보였지만 차는 폐차해야 했고, 아내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당시는 코로나19로 병원이고 직장이고 통제가 심했기에 아내는 병원에서 외부로 다닐 수도 없었고 나도 병원과 직장을 같이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병원을 다니며 아내를 돌보았었다. 병원시설도 오래된 곳이라 정말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나와 아내는 나름대로 즐겁게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간이 안되어 싱거운 병원밥을 둘이서 나눠먹은 기억이나 병원에서 화투를 치던 기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그리고 다시는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어찌 아내도 회복을 했다지만 이제 더 이상 아기를 위한 노력을 포기해야 했던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아내가 오랜만에 고향에 놀러 가서 친구들과 맛있는 뷔페를 먹고 그날 속이 좋지 않아 먹은 것을 도로 반납했던 날, 그게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며칠 뒤에 집에 돌아와서 확인하니 임신이 되었던 것이다.
아내가 임신테스트기로 임신을 확인했던 날 아침, 나는 잠을 자다가 살짝 깨어나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아내가 쏜살같이 방문을 젖히고 나에게 돌진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이후 경사임을 확인하고 같이 기뻐해주었다.
아내와 같이 갔던 산부인과에서 보이는 것은 조그마한 점과 같았다. 손발이 보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기다리던 아기였기에 아내는 정말 많은 것을 차곡차곡 준비해 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10개월 동안 베이비빌리에 주차별 해야 하는 것들을 보면서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기억나는 것만 이야기하자면 책 읽어주기, 일기 쓰기, 동화 만들기+음성 녹음, 아내말 잘 듣기, 태교여행 겸 이리저리 좋은 곳 다니기 등을 했던 것 같다.
아내는 특히 입덧이 심했는데 그걸 위해서 입덧밴드와 과일을 많이 먹었다. 나는 항상 출근 때 입덧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출근 전에 과일을 까놓거나 견과류를 놓거나 그날그날 먹어야 하는 영양제를 두고 가곤 했다.
옆에서 아내를 지켜보면 정말 괴로움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입덧, 철분복용으로 인한 변비, 그리고 임신 말기에는 옆구리를 채이는 고통, 운동을 못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동안 녀석은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는데 산부인과를 가면 부위별 길이에서 항상 머리 둘레는 상위 10퍼센트, 다리는 평균보다 조금 짧게 나오곤 했다. 머리는 항상 아빠를 닮은 것이라고 아내는 놀렸는데 변명거리가 없는 것이 분했다.
나는 그래도 머리가 크면 CPU가 큰 거니까 성능이 좋을 거라고 항상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녀석이 태어나기 얼마 전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는데 그 전의 집은 5층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이사비가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때 쓴 돈은 하나도 기억에 안 남는데 그때 이사를 안 했으면 어쨌을까 하는 안도감만 남아있다.
대망의 10개월에서 우리 가족은 녀석의 머리크기라는 이유로 주저 없이 제왕절개를 택했는데 아내도 염두에 두었겠지만 특히 녀석의 출생시간을 맞추어 주신다고 선생님마저 한마음 한뜻으로 도와주셨다. 그 이유는 본인이 태어난 날짜를 보면 스스로 깨닫게 될 거다.
지금도 명랑한 꼬맹이지만 나는 이미 우리 집에 활기를 불어넣을 아들이라는 조짐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믿는다. 너무나 귀엽고 놀라운 존재이기에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관찰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존재라는 걸 항상 기억하고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