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떼쓰는 게 이렇게 상상을 초월하는일일줄은 상상도 못 했다.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돼서부터 묘하게 눈도 잘 마주치고 요구사항도 많은 것 같더라니 그 관찰력이 곧 수많은 궁금증이 되고 모험정신을 일깨우는 모양이다.
우리 아들은 놀랍게도 내성적이다. 어디 가면 평소 잘하던 말도 줄어들고 그렇게 잘 뛰어다니던 아이가 새로운 장소만 가면 엄마와 아빠 뒤로 숨어서 나오질 않는다. 그렇지만 아는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표현이 180도 바뀐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엄마, 아빠에게 시킬 일도 많다.
저번주는 일 때문에 내내 일터에 붙잡혀 있다가 오랜만에 가족과 온전한 주말을 보냈다. 마침 아내와 아들은 전염성 피부질환과 코로나의 대환장 컬래버레이션으로 집에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주말 동안에만 정확하진 않지만 100권에 가까운 동화책을 읽어주고 돌아왔다. 물론 같은걸 수십 번 읽은 횟수도 포함이다.
내가 아들과의 책 읽기를 이렇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물론 내가 재밌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 재밌는 게 아니라 책을 듣는 아들의 모습이 재밌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데도 읽을 때마다 깔깔거리거나, 고작 그림인데도 곤충이 나오거나 하면 무섭다고 하고 책을 덮어버리는 아들의 모습은 어쩌면 내가 읽어주는 단순한 듣기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모험하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아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예전에 보았던 "허트로커"의 대사가 생각난다. 영화는 미국 폭발물 처리반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미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주인공이 생사를 넘나드는 임무를 마치고 휴가를 와서 어린 아들과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주다가 이런 대사를 한다.
그래.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동물이랑 엄마랑, 아빠랑, 잠옷도 좋아하는구나. 이것들이 네 전부지? 안 그래?
그거 알아? 너도 나이가 들면 지금 네가 좋아하는 것들은 더 이상 특별하지가 않아. 놀이상자도 그렇고, 아마도 그저 스프링이랑 인형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런 식으로 다가온다고.
그리고 내 나이쯤 되면 너한테 의미가 있는 건 한두 가지로 줄어들 거야. 내 경우엔, 하나뿐이지....
저 영화가 나온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내가 저 영화를 본 시점을 따져도 10년은 지났을 것이다. 나도 어느새 저 주인공의 대사가 마음에 와닿는 나이가 되었다. 심지어 어린 아들까지 있는 것도 닮았다.
주인공이 말하는 나이가 들면 의미 있는 것이 줄어든다는 내용에는 정말 깊이 공감한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좋은 것들 중 무엇을 왜 의미 있는 것으로 남기는가? 나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믿고 싶다. 어린 시절 행복과 기쁨을 주었던 것은 결국 나중에 찾게 되어있다고.
아들에게 다양한 책을 읽어주고 싶고주말마다 다양한 곳에 다니는 등 아들과 함께하는 이 모든 일들 중에 아들이 나이가 들어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빠에게는 사소하고 때때로 지루하게 느껴지는 일들마저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오직 너니까 가능한 일이다.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