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는 '몸'을 중심으로 글을 쓰겠다는 나름의 콘셉트를 잡으면서 글감을 찾고자 일상생활을 하는 내 몸을 더 자주 관찰하게 되었다. 그중 자주 인식의 그물망에 걸리는 것이 먹고 있는 나의 몸이었다. 먹는 행위와 먹는 몸, 식이 조절, 식사 습관 등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보편적인 '다이어트' 담론과는 다른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선뜻 글을 쓸 마음을 먹지는 못하고 있었다. '보편적인 것과 다르게? 그럼 어떻게?'에 대한 나의 답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 역시도 '날씬한 여성의 몸'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글이 너무 쉽게 '살을 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취지로 흐르게 될까 봐 두려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먹는 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아직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지만 이 생각들이 다 정리되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그럼에도 먹는 몸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 조각들이 꽤 있기에,
일단 크게 거르지 않고 적어 보기로 한다.
이런 수다 떠는 듯한 이야기들이 나중에 어떻게 정리될 수 있을지, 정리가 될 수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 먹는 몸과 '다이어트' 담론
'다이어트'가 본래 '식이' 내지 '식습관'이라는 중립적인 의미의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식습관을 조절하는 행위'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특히 여기서의 특정 목적은 지배적으로 체중계의 숫자 혹은 치수를 줄이는 것과 관계된다. "살을 빼려면 잘 먹어야 해요"라거나 "살 빼주는 음식", "살찌는 음식"같은 익숙한 수사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먹는 행위의 목적 내지 결과를 체중/체형 조절에만 두며 먹기에 대한 우리의 사고와 경험을 틀짓는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먹는 행위의 목적이 정해지기 전에 먹는 행위 자체 그리고 먹을 때에 우리의 몸 자체를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다. 먹는 행위는 물론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와 영양소를 얻기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너무도 당연히 우리는 살기 위해서만 먹지 않으며, 오히려 먹는 즐거움으로부터 삶의 지고한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살기 위해 먹니? 먹기 위해 사니?"
이런 이분법적인 질문은 어디서라도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 나는 살기 위해 먹는 것도 아니고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먹는 행위가 그저 살기 위한 행위가 되어버린다면, 내 삶을 채우는 즐거움 중 아주 커다란 한 부분이 도려내어질 것이다. 먹는 것은 꼭 필요한 동시에 충만한 삶의 경험이다. 아니 충만한 경험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먹는 것만이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내 삶의 목적이야 나도 잘 모르는데 누가 알겠냐만은, 먹는 즐거움이나 충족감이 다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이것은 머리로 따지기 이전에 우리 몸이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먹기만 할 수 없다. 먹다 보면 배가 부르고, 그러면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다. 먹기를 멈춘다고 해서 내 삶이 일시 정지되거나 먹지 않을 때에는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런 질문이나 "저는 먹기 위해 살아요"하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특히 대중 매체를 통해서) 이야기되는 것을 보면, 보는 나도 둘 중 어느 한쪽에 자신을 욱여넣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적어도 '나는 어느 쪽이지?'를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어느 누구라도 양쪽 중 한쪽에만 속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마당에 이런 식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글쎄... 간혹 살기 위해서만 먹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기도 하니까 아주 당연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이런 규정으로 인해 이후 나의 행위나 생각, 그리고 먹기와 관련된 경험들이 제한되는 것은 아닌가?
#몸의 경험으로서 먹기
하지만 먹기가 언제나 충만한 경험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혹은 바쁘고 피곤한 삶 속에서 일상적인 식사를 통해 아주 충만한 먹기 경험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애니메이션 영화 <라따뚜이>에서 단연코 나에게 인상적인 부분은 엄청난 미각과 요리 실력을 갖춘 쥐, 래미가 치즈와 딸기를 먹으며 그 맛을 묘사하는 장면이었다. 여기서 맛에 대한 묘사는 대사를 통해서뿐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서도 제시되는데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이런 현란함이 조금 말도 안 된다 싶었다. 당시 나는 그렇게까지 음식의 풍미를 제대로 경험한 기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예민한 미각을 가진 미식가들은 음식을 먹을 때 저런 경험을 할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에 최근 들어 먹기와 관련해 상당히 인상적인 두 가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마음 채움 명상 중 '먹기 명상'을 해본 경험이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새벽 요가 수업을 두 타임 하고 곧바로 이동해서 개인 레슨을 해야 했던 날이었다. 수업 사이에 15분쯤 시간 여유가 있었는데, 밥을 먹기는 짧고 굶으며 버티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편의점에 들어가 맛이 아주 감동적이라는 계란 2알을 샀다. 당시에 마음 챙김 명상 앱을 받아서 이것저것 시도해보던 중이었던 터라 그중에 먹기 명상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사실 배고플 때 계란 2알은 먹는 시간보다 까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은 음식이지만, 그보다 더 챙겨 먹기에도 애매했기 때문에 헛헛한 마음을 달랠 겸 명상을 해보려 했던 것이다.
이어폰을 끼고 지도자의 지침을 따라갔다. 계란 두 알의 모양과 색깔을 눈으로 더듬고, 이 계란이 어디서 어떻게 나와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지금 내 앞에 까지 왔을까를 생각하고, 그 계란을 들고 무게를 느껴 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계란을 까는 손의 감각을 예민하게 따라가 보고, 따라가는 동안 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대감을 인식해보고, (드디어!) 한 입 먹어 보고, 먹으며 그 맛을 느껴 보고, 두 입 먹어 보고... 그렇게 계란 두 알을 먹었다.
와... 생각보다 엄청난 경험이었다.
계란 두 알이 그렇게 묵직한 음식인 줄 결코 몰랐다. 계란에 그렇게 많은 맛이 들어 있는 지도 잘 몰랐다. 정말 그야말로 감동적인 맛이었다. 만족감이 밀려와서 뭘 더 먹고 싶지도 않아졌다.
이런 충족감이 너무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식사를 할 때 먹기 명상을 시도해보았다. 역시 다른 때에 비해서 훨씬 다채로운 식사 경험이 되었고, 적은 양을 먹어도 쉽게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라면 문제랄까... 이 경험이 너무 묵직해서 식사하는 것이 나에게 일종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밥을 먹는 시간은 다채로운 맛과 음식에 대한 경험인 동시에 일종의 쉬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먹기 명상을 하는 것은 약간 몸이 피곤할 정도로 예민하게 모든 감각을 세워 놓아야 해서 먹고 나면 오히려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 삼일 만에 매 끼니 먹기 명상을 하는 것은 포기하게 되었다.
더 최근에는 먹기 명상 경험과 유사하지만 조금 색다른 경험을 했다. 지난 1학기에 학교에서 들었던 수업 중 소마틱스*를 다루는 무용과학세미나 수업에서 먹기 관찰을 해본 것이었다. 우리는 이 활동을 3가지 단계로 진행했는데, 다음 단계에 대한 정보 없이 하나씩 순차적으로 경험했다. 내가 먹은 음식은 뻥튀기에 달달한 것을 묻힌 쌀과자였다.
-1단계: 그냥 먹기
그냥 쌀과자였다. 내가 익히 아는 맛, 달짝지근하고, 고소하고, 바삭한 그것. 사실 내가 즐기기에는 너무 단 맛.
-2단계: 어떤 맛이 있는지 찾으며 먹기
호오... 굳이 열심히 찾으려고 드니 맛이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일단 이 과자가 달긴 단데, 여러 방식으로 달다. 입을 제일 먼저 찌르고 들어오는 가벼운 단 맛이 있고, 쌀이 녹으면서 약간의 찝찔한 단맛이 따라 들어온다. 고소하다기보다는 구수함에 가깝지만 그리 진하지는 않고 약간 위에 덮인 향처럼 느껴진다. 누룽지의 맛이라기보다 누룽지를 상상하게 하는 맛이랄까. 그리고 이 과자는 녹으면서 찐득해진다. 등등.
-3단계: 이 음식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상상하며 여러 방법으로 먹기
음... 외계인이 이걸 처음 손에 넣었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본다. 이건 하얗고 가볍고 손으로 잡고 있으면 손이 살짝 끈적해진다. 외형을 보아도 냄새를 맡아보아도 너무 먹는 것처럼, 적어도 입에 넣어도 무해할 것처럼 생겼다. 조심스럽게 살짝 깨물어 본다. 아작하면서 안에서 공기 방울이 터지듯 일부는 부서지고 일부는 녹아내린다. 달다. 신기하게도 이 과자를 이루고 있는 입자들 사이에 무수히 많은 공기 알갱이가 들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공기의 냄새인지 맛인지 혹은 내 상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인공적인 향이 느껴진다.
의아한 점은 그 후에 2단계 같은 다채로운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 세 번째로 먹는 것이라 자극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진 이유일 수도 있고, 혹은 훅 치고 들어온 인공적인 향이 나의 비위를 상하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수업의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같은 활동을 생크림 케이크를 가지고 했을 때, 10명이 넘는 학생들이 소형 케이크 한 판을 다 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이 못 먹은 이유야 아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생크림 케이크를 이런 식으로 먹는 것은 어떤 경험이었을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먹기 명상이 처음부터 음식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음식에 대한 충만한 경험을 이끌어준다면, 이 활동은 일단 평소 먹던 대로 먹기부터 시작함으로써 이후에 같은 음식에 대해 더 풍성해지거나 혹은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는 감각을 적극적으로 비교하게 만들었다. 이 경험 이후에 간혹, 어떤 음식을 한참 먹다가도 그 음식을 약간은 생경하게 바라보고, 냄새도 킁킁 맡아보고, 먹으면서 느껴지는 다양한 맛을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음식을 먹으면 먹는 행위가 조금 더 재밌게 느껴진다.
#먹는 사람으로서 나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 미각이 그리 예민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었다. 아마 많은 부분 우리 언니와의 비교 때문일 텐데, 언니는 나에 비해 맛에 매우 민감한 편이었고 그래서인지 나보다 입도 짧고 음식에 대한 요구사항이 많은 편이었다. 이것은 언니의 예민한 미각뿐 아니라 상당히 인상적인 후각의 지원을 통해 생긴 까다로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언니는 엄마가 떡을 찌고 있을 때 그 김의 냄새를 맡고 무슨 떡을 찌고 있는지 종류를 알아내는 날카로운 후각의 소유자였다. 그에 비해 나는 엄마가 들통 가득 곰탕을 끓여 놓고 나가면, 군말 않고 몇 날 며칠 삼시 세끼 곰탕에 밥을 말아서 '맛있게' 먹는 딸이었다. 이렇게 한 가지 음식을 질리지 않고 계속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라면 능력일 텐데, 이런 나의 능력은 (기질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언니보다 '착한 딸'로서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던 둘째의 열등감으로 인해 어느 정도 길러진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먹는 것에 있어서 그다지 까다롭지는 않은 나에게도 예민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식감이다. 나에게는 음식이 달고, 짜고, 시고... 한 맛도 중요하지만 그 음식이 씹히는 느낌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맛보다 식감이 더 중요하다고 느낄 때도 많은 것 같다. 가령, 사과는 달지는 않아도 되지만 아삭해야 하고, 고구마와 단호박 역시 달지는 않아도 되지만 팍신해야 한다. 또 무말랭이는 얼마나 맵건, 짜건, 달건 간에 오독오독 씹히기만 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고, 튀김은 종류와 상관없이 바삭한 것이 진리이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찍먹파여야 할 것 같지만, 사실 늘 항상 찍먹파는 아닌데, 튀김옷이 찹쌀로 되어 있을 경우에는 소스가 배어들어 쫀득한 식감일 때가 더 좋고, 그냥 밀가루 튀김옷을 사용한 경우에는 바삭한 게 훨씬 즐겁기 때문이다. 바나나도 푹 익어서 단내가 나는 것보다는 파랗게 덜 익은 상태에서 쫀득하고 새콤한 맛이 나는 걸 좋아한다. 대부분의 과일은 껍찔채로 먹는다. (수박/멜론/파인애플 빼고 거의 전부) 그래야 맛도 식감도 풍성해진다.
내가 여름을 사랑하는 많은 이유 중 아주 주요한 두 가지는 옥수수와 복숭아이다. 안 그래도 과일과 구황작물 종류를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옥수수와 복숭아는 단연코 최애 중 최애템들이다. 알알이 쪽쪽 떨어져 내 입으로 들어와서, 씹으면 툭 터지며 찰지고 구수하고 달달한 알맹이가 혀에 감기는 탱글탱글하게 여문 누르스름한 강원도 찰옥수수. 발그스름한 껍질을 물에 씻어서 잔털들을 제거하면 뽀득한 껍질 위로 물이 한 방울 또륵 흘러내리고, 칼로 한 조각 잘라 뚝 떼어내면 씨앗에서 쪽 떨어지면서, 씹으면 아삭하고 향긋하고 시원한 즙이 흘러나오는 분홍빛 딱딱이 복숭아,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삶이 얼마나 헛헛하게 느껴질까. 복숭아와 옥수수는 나에게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 후각적, 미각적으로 충만한 경험을 선사하는 여름날의 선샤인이다.
#요즘 연습 중인 식습관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 10년 넘게 혼자 살면서, 밥 먹을 때 밥만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최소한 읽지 않으면 너무 무료하고 지루해서 반드시 무엇에라도 눈을 박고 혹은 귀를 기울이며 식사를 해왔다. 10년 내내 그렇지는 않았지만 최근 몇 년 들어서는 눈과 귀는 화면에 고정하고 손과 입으로만 음식을 먹을 때가 많았고, 그 때문인지 먹어도 먹어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먹기 명상과 먹기 관찰을 해보면서 나의 식습관이 얼마나 먹는 경험을 단조롭게 만들어 왔는지를 많이 느꼈다. 더불어 먹기 자체가 즐길거리가 풍성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럼에도 매 끼니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며 식사를 하는 것은 여전히 피곤하게 느껴졌기에 나는 요즘 딱 한 가지만 지키고 있다. 먹을 때 다른 것들을 치워버리기. 모든 종류의 비디오, 오디오, 텍스트 자극으로부터 나를 놓아주기. 밥 먹으면서 음식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딴생각을 할 때도 많고 습관적으로 음식을 입에 욱여넣는 때도 있지만 그래도 추가적인 외부의 자극들만은 들어오지 않도록 만들기로 했다. 먹기 명상만큼 다채로운 경험은 아니지만, 음식을 접하는 나의 몸 경험에 집중하는 순간들이 훨씬 많아졌다. 식사 패턴이나 식욕이 많이 안정된 느낌도 들어서 나름 만족스러운 효과들도 확인하며 계속 실천하는 중이다. 먹기는 음식에 대한 경험이기도 하지만 먹고 있는 내 몸에 대한 경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구성한다.
*소마틱스는 살아있는 몸 또는 물리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소마'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 개념을 처음 제안한 토마스 한나는 소마를 "'1자 관점에서 인지한 몸' 또는 '내적으로 경험한 몸'으로 정의한다. 또한 바디마인드센터링을 개발한 보니 베인브리지 코헨은 소마를 '대상화된 몸과 대비하여 경험된 몸'으로 바라보는 토마스 한나의 의견에 더하여 "몸을 내부에서 경험하게 되면, 몸과 마음을 분리시키지 않고 전체성으로 경험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토마스 한나, "소마틱스", 최광석 옮김, 군자출판사, 2019, pp. vi-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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