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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Sep 07. 2020

어떤 굴욕

문이 있으나 드나들지 못하고

1:1 방문 요가 레슨을 하다 보면 피치 못하게 고급 아파트나 빌라들을 종종 방문하게 된다. 온갖 요가 스튜디오와 짐이 널려 있는 서울에서 운동을 굳이 비싼 돈 주고 1:1로 하려는 분들 중에는 집값이 비싼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확률상 많기 때문일 테다. 서울 집값이야 어딘들 녹녹한 곳이 있으랴마는, 그중에서도 대기업의 유명 브랜드 이름이 붙은 신축 고급 아파트에 가보면 과연 단지에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이름값이란 걸 느낄 때가 많다. 


모든 고급 아파트가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또 적지 않은 비율로 외부에 담장을 쳐놓아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데 한참 걸리게 만들어 놓은 아파트들이 있다. 내가 올라가야 하는 동이 코앞에 있는데 이쪽으로는 진입로가 없어서 반대편 정문까지 돌아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곳은 내가 사는 동네와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울타리 같은 것이 전혀 없어서 목적하는 곳이 어느 방향인지에 따라 단지 내에서 요리조리 빠른 길을 찾는 재미가 있는 우리 아파트와 달리, 모두가 허용된 통로로만 다녀야 하는 세상.


하지만 이런 세상이라도 주민들만은 '특권'을 누린다. 옆이나 뒤로 나있는 후문들로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인데 이 문들은 주민이 아니면 드나들 수 없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차가운 도시의 아파트, 그렇지만 내 주민들에겐 따뜻하지...' 이런 게 콘셉트이려나. 처음 이렇게 담장이 쳐진 아파트에 수업을 하러 갔던 날이 생생하다. 아파트 단지가 담장으로 둘러쳐져 문이란 걸 찾아야 한다는 점에 한 번, 겨우 찾아낸 문이 잠겨 있어서 또 한 번 당황했다. 내가 방문하는 집으로 인터폰 연결이라도 할 수 있나 보았지만 그런 시스템이 아닌 듯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잠긴 문 앞에서 잠시 동공 지진을 경험하고 있는 사이에 옆에 서 계시던 주민 분이 카드키를 찍고 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수업을 한 후 회원께 물어보니, 그 문은 주민들이 사용하는 문이라 방문객들은 다른 쪽에 있는 정문을 통해 들어올 수 있다고 하셨다. 그분은 친절하게도 나에게 주민용 카드키가 필요한지 물어봐주셨지만, 내가 주민도 아니고 몇 분 돌아서 들어가면 되니 굳이 카드키를 가져야 할 만한 일은 아니라 사양했다. 담장을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아파트들이 있다고 하더니 여기가 바로 그런 아파트였구나 싶었다. 수업이 끝난 후 정문을 찾아서 나가 보았다. 내가 왔던 방향으로부터 정 반대쪽에 위풍당당한 문이 있었고, 경비 초소는 젊은 남성 보안 요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 이후로 그 집에 수업을 갈 때마다 당연히 정문까지 돌아서 들어갔다. 5분 더 여유 있게 출발하면 되니 큰 문제는 전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정문으로 가는 길에 첫날 운 좋게 들어갔던 그 옆문을 지나칠 때면 유난히 아파트 담장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정문까지 돌아 들어가는 길 위에서 온갖 생각들을 하곤 했다. '도대체 저 담장 안에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 꽁꽁 둘러싸놓은 것일까? 놀이터와 정원이 금으로 되어있기라도 한 걸까? 이 아파트 아이들이 아니면 와서 놀지도 못하겠군. 아무리 주민들이라고 해도 이렇게 담을 쌓고 문도 잠가 놓으면 드나들기 불편하지 않을까? 이런 걸 '특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학생 시절, 교실 문을 열었는데 소위 '일진'이라 불리던 아이들이 교실 한가운데에 모여 책상들 사이사이에 다리를 쭉쭉 뻗고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면 나는 그 아이들이 다리로 막고 있는 통로를 피해 멀찍이 돌아서 내 자리로 가곤 했다. 가까운 길이 있음에도 가지 못하고 빙 돌아서 걷는 동안 나는 점점 더 그 아이들을 무섭게 여기고, 내 친구 목록에서 지워냈다. 같은 반에서 매일 얼굴 보고 지내면서도 일 년 내내 말 한 번 섞지 않았다. 어쩌면 학교 입학하던 첫날이 그 애들과 나 사이 마음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면 그 애들도 나에 대해 비슷한 것을 느꼈을 수도 있다. 중학교 때 나는 학교 성적이 좋은 아이였는데, 한 번은 우리 반에 시험 감독을 하러 들어온 선생님이 시험 시간 동안 내 책상 앞에 버티고 서있던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내 옆 줄에서 시험 보던 아이 사이를 막은 것이었는데, 그 친구는 위에서 얘기한 그 '일진'들 중 한 명이었다. 말을 나눠본 적은 없어도 한 반에서 생활하며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 애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만큼이나 내 시험 답안에도 관심이 없는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가 시험 시간에 커닝 같은 것을 하지 않을 걸 알았지만, 내 의사와 무관하게 멋대로 내 시험지를 사수하시는 그 선생님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 역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지만, 나와 그 친구 사이를 막아섬으로써 그 친구를 부정행위 용의자로 만들어버렸다. 이때 그 친구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때로 권력은 이렇게 아무런 말도 필요 없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거나 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모두가 지나다녀 마땅한 통로에 다리를 뻗어 놓는 행위를 통해 갈 수 있는 길과 갈 수 없는 길을 나누는 방식, 누군가의 답안지를 다른 누군가의 시야로부터 막아서는 행위를 통해 지켜져야 하는 대상과 잠재적 위험 인자를 나누는 방식으로. 그리고 몸으로 무언가를 수행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과 인식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효율적인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서 걷는 가운데, 미묘하게 커닝 용의자로 몰리고서도 마땅히 뭐라 하지도 못하고 솟아오르는 욕지거리를 참아내는 가운데, 배제와 구분 짓기를 스스로 체화한다. 




내가 방문하는 곳 중 다중 보안 시스템으로 치면 최고봉이라고 할만한 아파트가 있다. 최근 새로 시작한 레슨인데, 그 아파트에 갔던 첫날도 당황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지도 앱을 보며 어찌어찌 정문을 찾아 무탈하게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긴 했는데, 아파트 건물들에 동 수가 적혀 있지 않았다. 내가 들어가야 할 동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서 부득이 다시 정문까지 나와 보안 직원에게 101동이 어디냐고 물어보아야 했다. 그러자 그 직원은 내가 방문자인지, 처음 방문하는 것인지, 방문하는 집이 어디인지를 다시 묻더니, 인터폰을 연결해서 그 집에 방문 약속이 되어 있는 게 맞는지를 확인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조금 전에 경비 초소를 그냥 지나쳐서 단지 내로 들어갔다 나왔는데, 내가 방문자라는 것이 알려지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직원은 다음부터는 매 번 그곳에 와서 방문 사실을 알리고 들어가라고 했다.


'휴... 넉넉히 시간 여유를 두고 왔기에 망정이지...' 생각하며 마침내 목적지인 건물에 입성했는데, 웬걸... 건물 안에는 또 한 사람의 보안 직원이 있었다. 딱히 그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말 지도 모르고 또 그분이 나를 막아서는 것 같지도 않아 그냥 지나치려는데, 방금 나를 철저히 조사한 정문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내가 방문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기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 직원은 내가 방문할 집으로 인터폰을 연결했고 확인 후 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이 정도면 수업하는 것보다 집에 들어가는 게 더 힘들 지경이군...' 생각하며, 동시에 '안에 사시는 분들은 이게 번거롭지 않을까?' 생각했다. 


바로 엊그제에도 이 집에서 수업이 있었다. 평소와 다른 곳에서 출발했기 때문인지 지도 앱은 평소와 다른 길로 나를 인도했다. 그 안내를 따라가니 내가 드나들던 문이 아닌 다른 문이 나왔다. 이 문에도 경비 초소와 보안 직원이 있었는데, 다른 점은 문 앞에 정문에는 없던 낮은 문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잠금장치가 있어도 잠겨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문을 슬쩍 밀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문이 그냥 열렸다. 나는 돌아가지 않아도 됨을 감사하며 보안 직원을 흘긋 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보안 직원도 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 주었는데, 그걸 보자 문득 매번 방문 사실을 알리고 가라던 정문 직원의 목소리가 나를 찔렀다. 그래서 굳이, 굳이 직원에게 내가 수업이 있어서 방문한 것임을 알렸다. 


"여기! 저를 보세요! 본인은 이 아파트의 주민이 아니라 방문자! 외부인입니다!" 

내 말이 그 보안 직원에게는 이렇게 들렸을까? 

직원은 방문자는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통과할 뻔했던 문이 다시금 갈 수 없는 문이 되었다. 그 직원은 방문자는 정문으로 가야 한다며, 그곳에서부터 평소 내가 다니던 정문까지 얼마나 빙 돌아가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내 손으로 밀고 들어갔던 문을 다시 닫고 나오는데, 뒷목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머리로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두 다리가 너무 무거워서 주체할 수 없이 터덜터덜 걷게 되었다. 머릿속으로는 '이 바보! 그냥 들어가면 되지 그걸 왜 또 말해서 이 고생을 자처하냐!' 따위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내가 느낀 감정은 자책이나 후회가 아니었다. 이런 몸의 반응은 굴욕감의 신호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쩌면, 이 아파트에 왔던 첫날 정문의 초소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음을, 그 날의 굴욕감이 오늘 내가 결국, 굳이 방문자임을 알리게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그런 걸 가지고 굴욕감씩이나 느끼다니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과민 반응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조용히 작동하는 권력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안에서 체화되는 내가 무섭다. 두려움 때문에 더 펄쩍 뛰며 이건 좀 이상하다고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삶의 아주 많은 순간, 어쩌면 거의 모든 순간에 이러한 배제와 굴욕을 경험해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늘 있어도 갈 수 없는 길을 만나고, 나에게 허용된 길로 빙 돌아가야 하면서도, 잠재적 위해자 취급을 받으며 운신의 폭을 제한받아온 사람들. 배제의 경험을 말하려면 평생을 떠들기만 해도 모자랄 이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오며 어떤 굴욕과 어떤 무기력과 어떤 분노를 뼛속 깊이 체화할 수밖에 없었을지를 생각한다. 이들이 '별 것 아닌 일'에 펄쩍 뛰며 화를 낸다면 이 과민 반응을 과연 피해 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커버 이미지: Photo by cyrus gom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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