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고난 겁쟁이다. 여기서 내가 겁쟁이라고 하는 것은 도전 의식이 부족하다거나 대범하게 결정하고 행동하지 못하다는 것 같은 성격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조금 더 물리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나는 일단 깜짝깜짝 잘 놀라고 놀라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패닉 상태가 될 때가 많다. 몰래 다가가서 웍! 하고 놀라게 하는 장난 같은 것을 나에게 하면 나는 정말 심장이 나가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너무 놀라서 놀라게 한 사람이 같이 놀랄 정도이다.
오죽하면 전에 한 친구는 내가 잘 놀라는 게 신기하고 재밌다면서, “자, 하나, 둘, 셋 하고 웍! 할 거야. 하나, 둘, 셋, 웍!”하고 나를 놀라게 하는 장난을 치곤 했다. 잘 놀라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친구의 악취미는 꽤 오래갔는데, 내가 이렇게 할 때마다 정말 제대로 놀라 주었기 때문이다. 놀라게 할 줄 알고 있으면서도 일단 그 웍! 하는 소리가 들리면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같이 소스라치곤 했다.
어쩌면 다가올 충격의 시간을 알고 있어서 더 놀랐던 것 같기도 하다. 내 몸은 이미 그 놀람의 순간을 예상하며 긴장하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웍! 하면 그 소리와 힘에 온 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충격에도 잘 놀라고, 놀라면 순간적인 대처 능력이 0으로 수렴하는 신기한 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체육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체육 시간에는 내가 예상치 못한 일들, 혹은 예상해도 여전히 충격적인 일들이 내 몸에 너무 많이 벌어지고, 그때마다 나는 패닉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공포스럽게 느꼈던 종목은 바로 뜀틀 넘기였다. 빠르게 달려가다 구름판을 강하게 딛고 점프해서 뜀틀을 넘는 운동. 다리는 옆으로 벌리고 손으로는 뜀틀을 짚어서 엉덩이가 닿지 않게 넘어가는 바로 그 운동 말이다. 이렇게 말로는 백 번을 묘사할 수 있어도 저 운동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몸으로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달려 나갈 차례가 되면 머릿속이 이미 하얘지기 시작했고,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면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달리기 시작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분명 이번에도 실패하리란 걸. 그런 생각은 아무리 고개를 세게 저어도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내가 부정한다고 해도 그 두려움은 어디 가지 않았고 나는 그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간혹 맘을 단단히 먹고 이도 악물고 '절대 속도를 늦추지 않으리라!' 하며 있는 힘껏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뜀틀 위에 척 걸터앉아서 친구들에게 웃음을 주거나, 엉덩이가 뜀틀 끝에 걸려 눈물이 찔끔 나게 아플 때면 나도 모르게 앞으로 다시는 노력하지 않겠다 생각을 맘속으로 하고 있었다. 추진력을 받기 위해 속도를 더 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생각과 걱정에 사로잡힌 나의 달리기는 뜀틀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느려졌다. 구름판을 있는 힘껏 밟고 도약해야 하는 순간 즈음이 되면 나는 거의 멈춰 설 수도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내 몸이 가진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나는 충돌하는 것을 싫어했다.
스스로 속도를 늦추니 달려 나간 것이 무색하게 뜀틀의 길이를 넘도록 내 몸을 앞으로 밀어줄 추진력을(관성의 법칙) 거의 받지 못했다. 게다가 강한 힘으로 바닥을 디뎌야 그만큼 강한 힘이 나를 중력 반대 방향으로 밀어 올려준다는 물리 법칙(작용과 반작용)은 구름판에서 강하게 발을 구르는 것을 무서워하는 나 같은 아이는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점프의 높이가 높게 나올 리 만무했다. 가장 기본적인 역학 법칙들에 의해서 나는 뜀틀 넘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체육 선생님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저 “더 빨리 달려! 엉덩이가 무거워!”라며 나를 다그칠 뿐이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무서워서 달리는 게 안 되는데 어쩌라는 말인가요?
항상 이런 싸움이었다. 선생님이 하라는 것이 나는 무섭고, 무섭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물론 선생님도 그걸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나는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벌벌 떨다가, 실패를 상상하며 겁을 잔뜩 집어먹고는 실패를 향해 달려 나간다. 실패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너무너무 하기 싫지만 하라면 또 해야 하니까 매번 같은 필패의 길을 걷는다. 어떻게 다르게 시도해야 할지 모르고 그것을 고민할 정신도 에너지도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나의 학창 시절 체육 시간을 채색한 색깔이다. 그래서 체육 시간이 지긋지긋했다. 오늘은 또 나에게 뭘 하라고 할까 두려울 때도 많았다.
청소년기 체육 시간을 두려움과 실패로 먹칠된 시간으로 기억하는 것은 꽤나 서글픈 일이다. 그리고 이런 필패의 망령은 성인이 된 후에도 나에게서 잘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물구나무를 처음 시도했던 20살에도, 머리 서기 성공 이후 처음으로 두 손 짚고 서기를 배우다 다쳤을 때도 바로 이 망령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