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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Oct 21. 2019

이상한 크루즈의 앨리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비가 유난히도 오던 새벽. 나는 캐리어 하나를 끌고 분홍색 숄더 백과 가방을 엑스자로 메고 공항으로 향했다. 고작 마을버스를 타러 5분 정도를 걸어 나갔을 뿐인데 캐리어는 흠뻑 젖고 말았다. 비를 머금은 휴지처럼 나는 축축 처져있었다. 


-가슴이 울렁이고 자꾸 초조해지며 우울하다.

-몸도 마음도 답답하고 자꾸 한숨이 난다. 


여행, 특히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가 반복적으로 겪는 증상이다. 준비할 것은 많은데 끝까지 미루다가 전날 밤에야 가까스로 짐을 싸고 밤을 새우고 공항으로 향하기 일쑤고, 이번에도 그랬다. 이런 증상을 내 주변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겪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특히 최근에 결혼식을 마치고 몇 주 뒤에 긴 신혼여행을 떠난 친구 역시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이야기에 이건 하나의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가장 들뜨고 행복한 것이 마땅한 신혼여행을 앞두고조차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그게 보편적인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즐겁지 않고 떠나기 싫은 느낌. 긴 여행을 가기 전 이 복잡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트래블 블루’가 좋을 것 같다. 눈치 챘겠지만 ‘메리지 블루’에서 따왔는데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해온 큰 결정인데 두려운 것도, 그것이 삶을 꽤나 바꿀 거라는 것도 닮아있으니까. 이건 여행에서 혼자라 짊어질게 될 외로움이나 우울의 감정과도 결이 달라서 친구와 같이 떠날 때도 늘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 이유를 더듬더듬 풀어본다면 어떤 낯선 모 양의 곳에서 어떤 낯선 사건이 나를 어떻게 덮칠지 모르는 불확실함과 내가 오랫동안 비운 자리를 보며 아무도 나를 떠올리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뒤엉킨 게 아닐까? 


"중국 비자는 어디 있어?"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간 공항 체크인 카운터 직원의 말에 나는 그제야 잠이 깼다.  


"어, 나는 도착비자를 받을,, 아니 아니 144시간 트랜짓 비자를 받을 거야. 난 크루즈를 탈 거거든"


잠이 덜 깨 횡설수설하는 내게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크루즈 여행을 하는 사람은 144시간 비자를 받을 수 없어. 24시간 트랜짓 비자만이 가능해. 크루즈는 오늘 출발하는 게 맞아?” 


여행을 준비하기 전 상하이에서 하루를 머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었다. 길어질 여행 초반에 힘을 빼고 싶지 않아 바로 크루즈를 타기로 결정한 건 너무도 잘한 일이었다.  


“응, 내가 탈 크루즈는 오늘 저녁 8시에 떠나.” 


그는 내 크루즈 서류를 꼼꼼히 챙겨보고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하며 확인한 뒤 나를 보내줬다. 보딩을 기다리며 공항에 앉아있는데 자꾸만 방송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내 동행의 이름이었다. 뭐지? 그녀가 오지 않았나? 아니지 체크인을 안 했으면 이름을 부를 일도 없겠지? 이름을 부르는 거 보면 무슨 큰일이 있나 본데? 짐을 부치지 않은 채 보딩을 앞둔 내 동행은 항공사 직원에게 잡혀 있었다. 이번 여행의 유일한 동행이자 두 번째로 만난 J는 정말 간소한 짐을 들고 있었는데 내가 체크인 카운터에서 받은 집요한 질문을 보딩 카운터에서 똑같이 받고 있었다. 중국에서 출발하는 크루즈 비자와 관련 진짜 많은 글을 봤으나 24시간 만이 가능하다는 얘기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이 곤혹스러우면서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체득했다는 사실에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2시간 뒤 도착한 상하이의 입국 심사대에서는 오히려 막힘 없이 무사히 통과했고 푸동 공항에서 1시간 택시를 타고 바오산 항구에 도착했다. 배는 자욱한 안개에 뒤덮여 있었고 하늘은 흐릿했지만 멀리서도 X자가 눈에 띄었다. 내가 탈 셀러브리티 컨스틸레이션호의 로고였다. 평생을 틀림과 부정, 거부의 표식으로 알고 산 X가 그 순간 사방에서 나를 감싸는 포근한 손길로 바뀌었다. 나를 반기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를 직접 눈으로 보니 복잡하고 울렁거리는 마음은 잠잠해지고 그 위로 설렘과 들뜸이 휘몰아쳤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내가 ‘트래블 블루’라고 일컬은 붕 뜬 마음은 대부분 비행기를 붕타고 여행지에 두발을 내딛고 여행이 현실이 되는 순간 파스스 사라진다. 


“중국에서 출발하는 배는 중국인이 대부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여행을 떠나기 전 서울에서 만난 J는 우려를 표시했다. 인터넷상에서 사람들은 중국인들을 일명 ‘메뚜기떼’라고 불렀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우르르 몰려들어 뷔페 음식을 초토화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런 글을 읽을 때 마다 빨간 메뚜기가 배의 모든 음식을 먹어 치우고는 거대해져 결국 배까지 갉아 먹는 상상을 하곤 했다. 중국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단일 때의 중국인들이 얼마나 목소리가 커지는지, 얼마나 용감해지는지 얼마나 거침없이 행동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 우려는 크루즈 체크인을 기다리며 자연스레 사라졌다.


"우와 신기해, 와 진짜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야. 우와 우와 졸라 신기해!"


크루즈 승선을 앞둔 대기실에서 난 세상을 처음 만난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을 길게 뺀 채 주변을 살펴보며 쉴새 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당연히 중국인들로 득실거릴 거라 생각한 그곳에 짙은 색의 머리 대신 하얗거나 금발의 서양인-특히 노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위에서 항공 샷으로 이 모습을 찍었다면 가만히 서서 풀을 먹는 퐁실퐁실한 양 떼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 90% 이상이 서양인이었고 대충 훑어봐도 ‘노인을 위한 나라’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의 노인이 그곳에 있었다. 평생을 한국에서 살았고 여행을 많이 다녔다 한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었을 뿐, 이렇게 많은 서양인을 한꺼번에 본 적도 없고, 특히 이렇게 많은 서양 노인과 한 공간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예상치 못한 광경은 굉장히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날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공간에 다 같이 앉아서 배로 들어가길 기다리며 설레하는 우리의 모습은 다 같이 수학여행을 온 듯했는데 나는 꼭 유럽 어드메에 있는 노인 학교에 잘 못 전입한 학생 같았다. 그리고 나는 흰 토끼가 아닌 흰 머리의 친구들을 따라 육지에서 배로 설치된 꼬불꼬불한 연결통로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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