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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Jan 17. 2020

크루즈 세계일주, 행복한 우리들의 테이블

크루즈에서 사람들과 가장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은 저녁 정찬 때이다. 보통 부부나 연인, 친구 등 동행이 있으면 동행하고만 앉게끔 자리를 지정해주는데,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 그냥 그대로 저녁을 먹으면 된다. 하지만 나처럼 혼자 크루즈를 타거나, 동행이 있지만 많은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면 합석 테이블을 신청하거나 나중에 바꾸면 된다.


첫 번째 배에서는 동행하고만 줄곧 밥을 먹었고, 두 번째 배는 정찬이 없었기에 세 번째 배인 풀만 투르의 첫 째날 정찬을 먹으러 가면서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일부러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7~8인용의 큰 테이블을 신청해놓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나라에서 온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7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근사하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내 테이블 번호를 묻고 자리로 데려다준다. 첫 번째 정찬은 7시 30분부터 시작인데 설렌 나머지 조금 일찍 도착했더니 대부분의 테이블이 텅 비어있다. 열다섯 걸음 정도 걸으니 NO. 34, 내가 앉아야 하는 테이블이다. 머리카락이 없는 덩치가 큰 서양인 할아버지와 동양인 같아 보이기도 하고 남미 사람 같기도 한 아줌마 한 명이 그 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순식간에 그들을 살핀 내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아…. 역시 젊은이는 없네….’


세 번째 크루즈인 풀만 투르는 스페인 배이기도 하고 크루즈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 매력적인 스페인 남자가 앉아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던 참이었다. 한쪽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올라~ 미 놈브레 에스 젠’ 이라고 끼 부리며 스페인어 인사를 하려고 준비했는데, 역시 지나친 내 욕심이었다. 크루즈에서 젊은 남자는 무슨, 나는 재빨리 마음을 비우고 해탈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머리카락이 없는 할아버지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온 스티브로 2년 전 부인과 사별해 혼자 크루즈 여행을 왔다고 했다. 동양인 같기도 했던 아줌마는 멕시코 시티 출신의 마리 카르멘이었다. 그녀는 영어가 서툴러서 이름과 국적, 혼자 왔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녀는 구글 번역기를 꺼내 들었지만 와이파이가 없어서 작동하지 않았다. 배에서는 와이파이는 돈 주고 사 써야 하는데 굉장히 비싸기에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우리가 한참 서로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더니 스티브를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억양으로 쉴새 없이 다다다다 이야기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둔데이에 사는 빌 이었다. 빌이 얼마나 빨리 이야기하는지는 들어본 사람만 안다. 정말이지 입에 모터를 단 것만 같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시골 사투리까지 더해져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다. 마리 카르멘은 빌을 퀵클리 퀵클리라고 불렀고 나도 늘 그녀가 지은 그 별명에 격하게 동의했다. 우리나라식으로 별명을 짓는다면 촉새가 딱 일거다. 촉새.


"와 우리 테이블은 싱글 테이블에 인터내셔날 테이블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멕시코, 한국에서 각각 혼자 왔다니!!"

                                                                                                                                 

진정한 인터내셔날을 완성하려면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쪽 사람도 필요했으나, 뭐 올림픽 게임 할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히 국제적이지. 그 뒤로는 첫날 뷔페에서 밥을 먹느라 정찬에 오지 않았던 미국 할머니 릭과 스코틀랜드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부녀, 노만과 수잔까지 우리 테이블에 합류해 총 7명이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젊은이 하나 없는 이 테이블을 마뜩잖게 느꼈던 나의 마음이 변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네이티브 스피커라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나머지 5명과 달리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마리 카르멘과 얼추 알아듣지만, 속도가 빨라지거나 문장이 길어지거나 단어가 어려워지면 귀가 자동문처럼 닫히고 어버버 거리는 나와는 모종의 연대감이 생겼다. 오프라인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구글 번역기를 다운로드해서 그녀와 이야기하곤 했는데 때로는 번역기 따위는 뒤로 치워둔 채 초등학생들처럼 스페인어 단어, 영어 단어 몇 가지를 반복하면서 낄낄거리곤 했다. 뭐 말하자면 베싸메무쵸, 퀵클리 퀵클리, 무이 비엔, 무이 보니따 이런 거였다. 이런 단어 서 네 가지로 크게 웃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가장 큰 웃음이 피었던 시간은 드레스코드가 ‘아랍풍’이었던 날이다. 풀만 투르 배의 가장 재밌는 점은 매일 매일마다의 드레스코드를 굉장히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거다. 물론 다른 배들도 정찬에 드레스코드를 정해주긴 하나 세미 캐주얼이나 정장 같이 포괄적이라면 풀만 투르는 갈라 나잇부터 시작해, 아랍풍, 블랙앤 화이트, 트로피컬 등 드레스 코드를 세세하게 정해주었다. 매일 주어진 드레스코드에 맞게 꾸미는 것도 흥미롭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치장하고 나올 지가 늘 기대됐다. 아랍풍으로 꾸밀 마땅한 옷이 없던 나는 고민고민하다가 그나마 히잡 처럼 머리에 감쌀 수 있는 셔츠 하나와 수건을 가방에 구겨 넣고 저녁식사 자리로 향했다. 화려한 빛깔의 스카프로 머리를 꽁꽁 감싸 메고 남색 컬러에 흰색 자수가 들어간 멕시코 의상으로 제법 아랍 느낌을 낸 카르멘이 자리에 있었다.


와~~쏘 굿~~"


모두 카르멘의 의상을 칭찬했지만 카르멘의 표정은 의아했다.


 "와이 온리 미?"


그녀는 드레스코드에 따르지 않은 우리를 질타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액츄얼리 아이 해브 디스..."


나는 얇은 재질의 셔츠를 꺼냈다. 그녀는 받아 들더니 그것이 셔츠인 것을 알고 호탕하게 웃었다. “오케이 오케이.” 하며 후다닥 접어 내 얼굴에 씌었는데 내가 해봤던 것보다 훨씬 그럴싸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카르멘은 아이디어가 번뜻 스친 것처럼 총명한 표정을 짓더니 흡사 맥가이버처럼 테이블에 있는 천들을 이용하여 뚝따리 뚝딱 터번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빌의 머리에 붉은색 테이블 냅킨을 걸치는 정도였으나 점차 발전했다. 빵 바구니 안의 흰 천을 꺼내서는 머리에 올리고 붉은 테이블 냅킨으로 감싸니 누가 나무라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터번이 완성되었다. 언뜻 마리 카르멘에게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스쳤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닌 테이블 냅킨의 기적 뭐 그런. 그렇게 한 명 한 명 카르멘 손에 아랍 사람으로 변신하고 우리는 다 같이 기념사진을 50장 정도는 찍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는 정찬 시간, 우리 테이블에서는 코메디 쇼라도 시청하는 듯 쉴새 없이 폭소가 터져 나왔다. 뭐가 저렇게 재밌나 궁금해하며 우리 테이블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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