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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Jan 19. 2020

크루즈 세계일주, 오늘의 가난은 어제한 여행의 값

랄레는 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포대자루 같은 히피풍의 옷을 입고 스카프를 뒤집어쓴 채 흐느적거리며 다가와 말을 건 랄레의 첫인상은 굉장히 강렬했다.


"나는 배에서 젊은 사람들을 찾고 있어. 너 여기 스태프야? 아니면 승객이야?"


이 전에 다른 배에서도 종종 들었던 질문이다. 젊은 아시아인이 혼자 크루즈에 있는 건 승객이라기보다는 스태프로 보이는 게 자연스러울 터였다.


“난 승객이야.”

“와우~굿~ 넌 혼자야?”

“응, 혼자”

“배에 젊은 사람이 너무 없어서 나는 젊은 사람들을 모아 파티를 하려고 해. 너도 우리와 함께하겠니?”


나 역시도 젊은 사람들에 목마르던 참이었다.


“물론이야.”

“좋아. 나는 내 친구 마틴과 같이 크루즈에 탔어. 내 얼굴을 기억해.”


그녀는 스카프를 벗고 자신의 얼굴을 각인시켜준 채 떠났다. 5분 남짓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독일인이라는 것,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산다는 것. 예전에 독일에서 펍크롤 가이드를 했다는 것, 거기에서 한국인들을 만나 소주를 안다는 것, 23살이라는 것, 마틴이라는 친구랑 같이 여행한다는 것 등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알게 되었다. 웃음이 배시시 흘러나왔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젊은이들을 호객하고 다닌다면 오바를 보태 사막에서 바늘 찾기 격인 크루즈 젊은이 모임이 형성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호객이 성공적이길 정말로 바랐다. 우리는 그 이후로 종종 디스코텍에서 놀았고 같이 술을 마셨다. 예상보다 젊은이들이 없었는지 랄레의 호객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포르투갈 부부와 같이 방 탈출 게임을 하고 러시아 젊은 여자애들과 같이 춤을 췄을 뿐, 우리와 어울리는 더 이상의 젊은이는 없었다.


랄레와 마틴의 관계는 좀 특별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게 된 그 둘은 이성이지만 절친이고 함께 전세계를 여행하는 사이였다. 이번이 둘이 함께 탄 세번 째 크루즈라고 했는데 심지어 둘은 한 달도 넘는 크루즈를 함께 타기도 했다. 처음에는 둘 사이의 썸을 의심했으나 서로 끔찍히 아끼고 애틋하지만 남녀의 기류는 전혀 없었기에 그 의심은 쉽사리 접었다. 내 어린 친구들은 젊음으로 가득 차 싱그러웠고 발짓 손짓 몸짓 하나 하나가 에너지 넘쳤고, 파괴적으로 술을 마셨으며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면서도 의외로 속도 깊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좋았다. 세 번 째 크루즈에서 휘엉청 뜬 보름달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으려고 야외 수영장이 있는 층으로 갔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휘엉청 보름달이 뜬 크루즈의 모습

"젠! 컴 히얼. 조인 어스!"


술에 취해 목소리 톤이 한껏 높아진 마틴이었다. 늘 양옆으로 동그랗게 머리를 묶은 게 마틴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자쿠지 욕조 안에서도 그 머리 모양은 견고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그 머리는 흡사 자꾸 남자로 오인 받아 스트레스받은 아이 엄마가 아이의 짧은 머리를 억지로 양옆으로 묶어 낸 모양이었는데 마틴에게 썩 잘 어울렸다. 저녁 정찬 시간이 30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고 나는 맨정신인데 둘은 너무 취해있어서 순간적으로 고민을 했다. 하지만 동그랗게 뜬 달은 너무 눈부시고 자쿠지는 너무 따뜻해 보였고, 술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이 둘이 함께 있는데 망설이는 건 사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나는 ‘슈어’라고 답하고 재빨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휘엉청 보름달이 뜬 크루즈의 모습

"젠, 진짜 왔네?"


랄레는 쿠바 리브레 다이어트 콜라로, 마틴은 보드카 소다, 나는 진 앤 하프토닉 하프소다, 우리의 시그니쳐 술을 양 손 가득 들고 온 나에게 마틴은 말했다. 


휘엉청 보름달이 뜬 크루즈의 모습

"젠, 너는 안 취했으니 샷 5잔을 먹어야 해."


랄레는 술 강요를 했다. 그것이 그녀의 특기이자 술버릇이었다. 대학교 신입생 때로 시간여행을 시켜주는 랄레의 술 강요에 나는 샷을 마시는 척하고 은근슬쩍 밖으로 버리곤 했다. 하지만 둘은 취했기 때문 내가 술을 마시는지 버리는지 관심도 없었다. 랄레가 가장 좋아한다던 뮤지션 에이미 와인 하우스의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다 갑자기 마틴이 자쿠지에 다이빙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던 술이 자쿠지로 쏟아졌다. 보드카와 럼과 진이 섞여 알코올 탕이 된 자쿠지에서 알코올 향이 솔솔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우리 수영장에서 다이빙하자."


마틴의 제안에 갑자기 분위기 다이빙이 되어 우리는 수영장 삼면에 서서 하나, 둘, 셋을 외치고는 동시에 뛰어 들기를 반복했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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