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젠젠 Jan 21. 2020

크루즈 세계일주, 심심할 틈 없는 하루하루

msc 크루즈의 선상신문

매일 저녁 선상신문이 배달된다. 선상 신문은 선내 정보, 기항지 정보, 날씨, 다음 날의 프로그램 등의 정보를 담은 신문이다. 내일은 과연 무슨 재미난 프로그램이 있을까 싶어 늘 이 신문을 목을 빼고 기다렸다. 첫날 신문을 보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전부 체크하다 보니 신문은 시험 기간 교과서처럼 지저분해졌을 정도이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흥미로워 보였고 참여하고 싶은데 시간이 겹친 프로그램을 아쉬워하며 고심고심해 우선순위를 정했다. 다음 날 아침 스트레칭은 늦잠으로 가지 못했고 싱글들의 점심 모임은 아점을 먹는 바람에 시간이 엉켰고 침술 강의는 실습도 없이 침술에 대한 이론적인 얘기만 늘어놓는 따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렇게 따라다닌 프로그램 중에서 재밌는 것들도 있었지만 이동하고 기다리고 좇는 시간에 비해 딱히 재미가 없거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프로그램도 많았다. 의욕에 가득 차 시행착오를 거듭하니 명료한 사실 하나를 파악했다. 크루즈 프로그램을 참여하는데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걸. 뭐 세상에 안 그런 게 있겠냐 만은,

msc 크루즈 춤 강습시간

크루즈의 프로그램은 대충 댄스, 요가 스트레칭 및 스포츠, 만들기, 테이스팅, 퀴즈 및 게임, 미용, 세미나, 공연으로 나눌 수 있다. 평소에 잘 접하기 어렵지만, 크루즈에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게 바로 댄스이다. 수영장 근처에서 다들 춤을 배우고 있고, 밴드들이 연주하는 옆에서 커플들이 부둥켜안고 춤을 추고 있고, 밤이 되면 디스코텍에서 다들 흥겹게 춤을 춘다. 댄스 강좌는 굉장히 많았는데 수영장에서 배우는 공개적인 댄스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상 내겐 불가능했다. 대신 작은 댄스 홀에서 열리는 댄스 레슨은 종종 참여했다. 보통 바차타, 차차차, 메렝게, 탱고 등 커플이 함께 추는 춤이 위주인지라 혼자인 나는 파트너를 찾지 못해 머쓱하게 있다 돌아온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을 되풀이 하다 보면 결국 혼자인걸 신경 쓰고 움츠러드는 건 나 혼자뿐인걸 알게 된다. 춤을 배우고 나서 파트너가 필요한 순간에 어떻게든 함께 춤출 사람은 생긴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그렇게 생각하니 춤을 배우는 시간이 좀 더 쉬워졌다. 다만 내가 몸치라는 것을 번번히 깨달으며 늘 파트너에게 민망하긴 했지만 말이다.                                                                          

강습으로 대충 스텝을 익혔다면 저녁에 실전에 돌입하면 된다

 어렸을 때부터 꼼지락꼼지락 만드는 걸 좋아했기에 만들기 프로그램도 내가 집중해서 자주 참여했던 프로그램이다. 펠트 지갑, 뺏지, 부직포 꽃, 열쇠고리, 가방까지 별별 거 많이도 만들었다.     

겐팅 드림호에서 만든 지갑과 풀만투르 크루즈에서 직접 그려서 만든 가방

                                                                                                                                

결과물들의 완성도가 높지 않아 때로는 초등학생 만들기 시간을 연상시키는 만들기도 있었으나 결과물 자체보다는 만드는 과정이 늘 즐거웠다. 어렸을 적 ‘만들어 볼까요?’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텔레비전을 보며 쪼물딱 쪼물딱 만들던 기억도 아롱아롱 피어나기도 했고. 그래서 그 만든 걸 직접 사용한다고 묻느냐면,,, 단 한 가지만 사용하고 있다. 바다와 배 석양을 직접 그린 천 가방. 만들고 난 이후로 내 보조 가방으로 늘 내 옆을 지켜주었다. 


크루즈의 모든 프로그램이 무료냐 하면은 그렇지는 않다. 요가나 스피닝 같은 운동이나 술 테이스팅, 빙고 게임, 로또 게임 같은 건 유료로 이루어진다. 럼 테이스팅, 위스키 테이스팅, 칵테일 클래스 등 매력적인 술 수업도 유료로 진행되었는데 술꾼인 내가 참여를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모두 참여하기엔 경제적 부담이 되기에 고심해서 고른 수업은 월드 와인 테이스팅이었다.

                                                                                                                                                

소믈리에 6명이 각각의 나라를 담당하고 시음을 도와준다

 남미, 프랑스, 이탈리아, 오세아니아, 북미 6개로 구분 지어진 나라의 화이트 와인과 레드와인을 30 달러에 직접 시음하고 평가하는 가성비 갑 프로그램 이었다. 전날의 과음으로 간이 신음하고 있었지만 돈을 미리 지불했기에 빠질 수 없었고, 허투루 임할 수 없었다. 성난 간을 살살 달래며 조금씩 조금씩 와인을 밀어 넣었다. 자극이 약한 화이트 와인부터 천천히 들이미니 간은 헤벌쭉 잘도 받아 들인다. 멍청한 건지 강인한 건지 모르겠는 간의 투혼이다. 사뭇 진지하게 시음지에다가 맛 평가를 하는데 와인은 정말 1도 모르기 때문에 초보적인 메모일 뿐이다. 와인 맛은 잘 몰라도 그 포도들이 자랐을 전 세계의 따뜻한 햇살이, 숙성하기 까지의 인고의 시간이 농축된 와인이 내 온몸에 퍼지는 느낌이 행복하다는 건 잘 안다. 내게 가장 잘 맞은 건 스페인 와인이었다. 천천히 10번 째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와인을 정리하고 있었다. 제기랄, 시간제한이 있다고는 말 안 했잖아!! 당황한 나는 소믈리에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나 2개의 와인을 아직 못 먹었어. 호주 와인이랑 미국 와인 말이야.” 

“미안, 그 2개의 와인은 없어.” 

“없다고???? 나 아직 못 먹었는데?” 

“대신 이거라도 마실래?”

                                                                                                                                 

소믈리에는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을 내밀었다. 나의 순위 리스트의 뒤쪽에 있던 아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느냐. 마시면 결국 취하는 건 똑같은 것을.

                                                                                                                        

"어어 물론이지."

                                                                 

와인잔과 사진을 찍고 놀다 저 멀리 하얀 점을 발견했다.
줌을 당겨보니 어슴푸레한 달이다

그는 병에 있는 와인을 탈탈 털어 내 와인잔에 따라 주었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은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방금까지 세상을 잃은 것 마냥 허탈해하던 나는 바로 기분이 좋아져서 와인을 들고 썬베드로 갔다. 태양을 쬐며 마시는 화이트 와인은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책을 펼치고 음악을 틀었다. 유난히도 파란 하늘에는 무심하게 반쯤 쓰윽 지운 어슴푸레한 달이 떠 있었다. 바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프로그램을 참여하며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썬베드에 자리잡고 누워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해를 쬐고,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고, 술 한 잔 하는 여유로운 시간에 비할 수는 없다. 크루즈를 여러 번 탔다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 묻는다. 지루하지 않느냐고. 지루하기는커녕 바쁠 지경이다. 프로그램을 참여하느라, 나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온전히 누리느라. 그 둘 간의 균형을 잡느라.          

매거진의 이전글 크루즈 세계일주, 오늘의 가난은 어제한 여행의 값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