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증명하지 않기로 했다

정량 인간, 아니 정성 인간

by zeon
밤이 되면 도시는 옷을 갈아입는다.


무채색의 낮과 대비되는 밤의 풍경은 호화롭다. 낮이 의무의 시간이라면, 밤은 선택의 시간이다. 그래서 네온사인 빛과 입간판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선택받지 못하면, 남는 것은 무의미뿐이다. 밤의 경쟁은 생존이다.


그런 밤의 모습은 마치 나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스스로를 증명하게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모습, 결국 나의 모습이었다. 잘하고 있다는 걸, 쓸모 있는 존재라는 걸,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연봉, 아파트 면적, SNS 팔로어, 체지방률. 모든 것이 정량화되고, 수치는 곧 존재를 대체했다. 마치 그것이 나의 본질인 듯, 더욱 갈망하고 집착했다.


하지만 그런 증명은 끝이 없었다. 한번 높아진 기준선은 다시 내려오지 않았고, 오늘의 ‘좋아요’는 내일의 갈증으로 이어졌다. 다른 모습을 준비해야 했고, 멈추는 순간 밤의 불빛이 꺼지듯, 나의 존재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나로서 사는 게 아닌 누군가의 인정으로 사는 삶이었다.


하루하루를 시험대 위에서 사는 삶,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겨우 내 존재가 승인받는 기분, 진짜 내가 아닌 ‘괜찮은 나’를 연기하고 있는 일상.

‘나는 지금 누구의 무대 위에 서 있는 걸까?‘


낮의 무대는 종종 밤으로 이어진다. 술잔을 들고 무심히 웃고 있었지만, 나는 늘 계산 중이었다.

“박 선임이 맡은 방지시설 고도화 프로젝트가 이번 분기 우수 사례로 선정되었데.”

“이 책임은 미국 지사 발령을 검토 중이래.”


직원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는 부러움과 시기가 교차했다. 나도 뒤질세라 최근 프로젝트와 피드백, 사소한 성취들을 슬쩍 던졌다. 최 사원도, 김 선임도, 말들을 쏟아내자, 모든 말들이 메아리처럼 흩어졌다. 빛나는 조명은 결국 희미한 자국만 남겼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스마트폰을 켰다. 낮에 올린 피드 속의 글과 사진을 다시 보았다. 존재의 기록인지, 과시의 흔적인지 점점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아래 달린 숫자.

‘좋아요 52개’


수치를 확인했지만, 더 선명해지는 건 마음의 빈자리였다. 그 숫자가 나를 증명해주지 않는다고 최면을 걸어도, 나는 화면 속의 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바깥 상가 간판이 깜빡이는 모습이, 폰 화면 불빛과 겹쳐졌다.


운동을 할 때도 건강보다 체성분 분석표의 숫자에 집착했다. 체지방률에 일희일비했고, 숫자가 내려가면 잠시 들떴다. 하지만 헬스장 거울 앞 모습과 분석표, 그리고 내면의 나는 같지만 낯설었다. 점점 지쳐가는 나를 마주했던 것이다.


늦은 밤 집으로 가는 골목길, 사람들의 웃음도, 네온사인도 사라졌다. 간간이 켜진 가로등만이 어둠에 매달려 있었다. 불빛이 없으니 모든 게 낡고 쓸쓸해 보였지만, 나는 그 적막 속에서 내 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증명할 필요 없는 어둠, 그리고 그 속에서 유일한 존재라는 자각. 눈부신 조명이 꺼지고 가로등만 남았을 때, 오히려 내 그림자가 더 선명해졌다. 빛나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존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그동안 누군가의 시선을 먹고 산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증명하지 않아도 여전히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밤이 다시 화려한 옷을 입더라도, 그 속에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질 것이다. 나는 지금, 존재 그 자체로 살아가는 법을 천천히 배우고 있다.


화려한 조명은 꺼져도, 나의 불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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