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에서 지혜로 넘어가는 길
지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떻게를 정의하기 전에 지혜란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다.
지혜란, 재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행동을 통해 배운 하나의 원칙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지혜의 기반은 지식이다.
지식은 내가 읽은 글들, 보았던 영상들, 나에게 누군가가 해주는 말들 그런 것들이다.
지식은 의지만 있다면 얻기 쉽다.
책을 읽을 수도, 좋아하는 사람의 블로그를 읽을 수도, 영상을 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지식의 체득 여부는 의지의 영역에 가깝다.
반면, 지식이 지혜가 되려면 지식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깊이 체화해보아서 그것의 유용성을 경험하거나, 부작용을 이해하는 등 온전히 그 지식을 느껴야한다.
지식이란건 절대 둥글둥글하지만은 않아서, 세상 만사가 그렇겠지만 좋은 점이 있다면 나쁜 점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지혜를 가지려면 자신의 지식을 시험해보아야한다. 적용해보아야하고, 온전히 그 지식의 무게를 감당해야만 한다.
나는 책을 정말 많이 읽는다. 아마 1년에 100권은 읽는 것 같다.
그럼, 내 지혜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까? 아마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혜란 지식을 시험해보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이 지혜가 많을 수 밖에 없는 “확률적” 이유는 그만큼 시험해볼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식이 의지의 측면으로 되는 것이라면 지혜의 체득이란 운에 가깝기도 하다.
그 지식을 온전히 경험해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야만 하니까. 그리고, 환경은 인간이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변수는 아니니까 운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운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운이 발생할 수 있는 시도의 수를 늘리는 것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으려면 지식을 시험해보는 실행을 해야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지식들을 나열해서 대화하는 것은 오히려 ‘지적 유희’에 가깝다.
철학적 논쟁들이 옭고 그름을 가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삶을 잘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답을 내려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지적 대화에서는 당연시 되는 통제 변수들이, 실제 삶에서는 작동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어쩌면 ‘반응’하는 존재다.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자연의 엄청난 힘 앞에서도,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생각해보면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수없이 마주하노라면
통제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올바른 반응을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삶의 행동 양식일 수도 있겠다.
오늘도 책을 읽다가 문득,
제프베조스가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하다가, 그는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을까를 고민하며
그가 쓴 지식들이 그의 지혜에서 비롯됨을 깨달았을 때,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보다 그가 어떤 상황을 겪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커졌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지혜로부터 표현된 지식이 나의 지혜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지식과 지혜를 구분하는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오늘의 초록이, 내일의 초록을 담보할 수 없지만
오늘의 초록을 온전히 경험하고 다음의 초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양재천에서 책을 읽고 쓰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한다.
지적 유희를 즐기는 지식이 많은 사람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삶의 여러 면들을 온전히 겪으며 기뻐하고, 슬퍼하고, 좌절하며, 다시 일어서서, 환희를 맞이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