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찬란한 첫 만남

나는야 엄마가 되었답니다.

by 제퍼

17년 전 2008년 가을, 이제 누워만 있지 않아도 되고 진통이 시작되면 바로 병원으로 오라는 의사의 해제 소견은 몸속의 생명을 잘 지켜내 출산까지 가는 길에 큰 고비를 넘겼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남편과 곧바로 미루어 두었던 출산 준비를 하러 갔다.


미리 작성해 둔 목록대로 아기 용품과 육아 용품을 마련했다. 앙증맞고 예쁜 것들이 정말 많았다. 이곳저곳, 여러 브랜드를 여유 있게 둘러보며 맘에 쏙 드는 걸로 고르고 고르는 재미를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게 소망일 뿐이었다. 조금씩 다녀도 된다는 의사의 진단이 곧 여느 산모처럼 움직임이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었다. 평소 누워 지내면서 물색해 두었던 신생아 용품 매장으로 직행하여 소망과 현실을 타협했다.


많은 품목들을 앞으로 키우면서 차차 마련하기로 하고 당장 꼭 필요하고 미리 사두어야 하는 것들로 속전속결 준비를 마쳤다. 방 한쪽에 가지런히 모아둔 아기 물품들을 보니 난생처음의 출산과 꿈꾸던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제대로 실감 났다.


"그때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할 만큼 출산 준비를 하고 며칠 후 예정일이 한참 남아있는 11월 초 새벽 진통이 오기 시작하고 양수가 터져 어두운 길을 달려 병원으로 향했다. 뭐가 뭔지 모르면서 병원에서 안내해 주는 대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출산을 했다. 별문제 없이 자연분만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이제는 출산이 가까워질수록 일정 간격으로 순간 극심하게 오던 진통의 아픔만 흐릿하게 기억난다. 임신까지, 그리고 임신 기간 동안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힘들었으니까 출산은 난항이지 않기를 바랐는데 순조롭게 진행되어 천만다행이었다. 결코 무난하지 않았던 임신 과정이었지만 순탄한 출산으로 마무리된 해피 엔딩이었다.


13시간 만에 불룩했던 배가 홀쭉해졌다. 입덧으로 모든 음식이 쓰기만 했던 것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변했다. 출산 후 입원실에서 먹은 미역국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미역국이었다.


다음 날, 난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경복궁 옆길로 접어드는 차 안에 있었다. 남편의 흥겨운 콧노래를 들으며 차 창밖으로 바라보았던 그날 풍경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단풍이 오랜만에 어느 해보다 아주 곱게 잘 든 때이기도 할뿐더러, 8년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한 아기의 부모, 엄마가 되어 그 풍요롭고 금빛 찬란한 늦가을의 아름다운 거리를 갓 태어난 아들을 고이 품에 안고 지나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기 전 극적인 화려함을 발하는 축복의 계절에 이 세상에 온 이 아기의 시간은 어떻게 펼쳐질까. 그것도 나를 엄마로 찾아온 것은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 나오는 대사처럼 지구상 한 곳에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또 밀씨 딱 하나를 떨어뜨리고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힐 확률로 태어나는 '인연'이라는 우주의 섭리가 강력하게 작용한 거겠지!


그렇게 몇 곱절 돌고 돌아 만난 인연! 지극히 평범한 나를 찾아온 아주 특별한 아기를 안고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아주 특별한 '내'가 된 것 같았다. 병원을 나와 한낮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가을 풍경들에 운명, 인연의 빛이 무수히 스쳐갔고 그것신비로움이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채워지는 걸 느꼈다.


갓 태어난 미지의 소우주를 만난 경이로움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환희로웠고, 이 작은 존재로 인해 경험하게 될 미래가 몹시 기대되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두려움도 일었다. 어쩌면 그것은 새 생명을 얻은 모성의 숙명 같은 것일지 모른다. 엄마라는 이름을 달아준 이 금빛 찬란한 만남이 과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