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세계는 애태움 8할과 평온 2할로 이루어진다
하얀 직사각형 아기 침대를 넋 놓고 내려다보고 있다. 깨끗한 파스텔블루 이불을 덮고 손싸개에 싸인 앙증맞은 두 주먹을 베개 위로 올리고 나비잠에 푹 빠진 어린 생명을 다소 어수룩한 생초보 엄마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본다.
"자는 아기의 얼굴은 천사 같다는 세간의 말이 찰떡같이 들어맞는구나" 혼잣말을 한다. 가느다란 쌕쌕 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아기의 모습은 마치 블랙홀 같다. 그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백의 아우라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고 일단 그 아우라에 휘감기면 헤어날 방법도 마음도 요원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머금고 있다.
한없을 것 같은 평온은 오래가지 않는다. 정지화면처럼 미동도 없던 아기가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한다. 팔을 쭉 뻗기도 하고 이불속의 다리를 움찔대기도 하며 조그만 입은 긴 하품을 한다. 그러더니 싸개에 덮인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눈을 뜬다. 내 눈과 딱 마주친다.
순간 나는 백일몽에서 화들짝 깨어난 듯 얕은 도리질을 한다. 그리곤 아기에게 커다란 미소를 날린다. 내 미소에 화답하듯 아기는 벙긋벙긋 웃는다. 걸쇠를 열고 몸을 낮춰 아기와 눈을 맞춘다. 까꿍! 잘 잤냐고 인사하며 팔, 등, 다리를 조물조물 마사지해 주니 시원한지 말랑말랑한 몸에 힘을 주어 기지개를 켠다. 이건 아기의 일과가 시작된다는 큐(cue)다.
아기가 걸음마를 하기 전 첫 돌 무렵까지는 일상의 평온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아기가 혼자 앉아 있을 수 있고 기어 다닐 수 있는 시기인 대략 생후 6~8개월까지 아기는 주로 누워 지낸다. 그러므로 때맞춰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시키고, 많이 눈 맞추며 얘기하는 것이 엄마의 주된 일이다. 이 시기에 아기는 엄마의 따스한 눈 맞춤, 손길, 냄새, 독백에 가까운 목소리, 그리고 집안의 공기와 분위기를 먹고 자란다. 아기는 엄마를 통해 세상의 문턱을 넘어 그 속으로 들어가는 단련을 시작한다.
표면적으로는 가장 고요하고 정적인 성장기이지만 그 이면에서 아기는 눈뜨면 온통 새로움을 마시느라 분주할 것이다. 지나고 보니 엄마 입장에서 그때가 육아 단계 중 가장 평온한 시절이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남아를 키우며 별로 조마조마한 마음 없이 비교적 우아하게 육아를 할 수 있는 때였는데 말이다.
생후 14개월 며칠쯤 되는 2010년 1월 어느 날 오후, 거실에 널브러진 장난감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있는데 놀라운 광경이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예상대로라면 거실 매트 위에서 한바탕 장난감을 갖고 놀고 새로 어지럽힐 다른 장소로 기어가고 있어야 하는데, 어~~ 주방에서 뒷 베란다로 나가는 통유리문을 향해 아기가 걷고 있지 뭔가. 뒤뚱뒤뚱거리며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급하게 걸어가고 있다.
놀라고 신기해서 "어머, 누구야 걸음마하네." 아기를 향해 하이톤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기는 놀란 표정으로 어설픈 자세로 뒤돌아보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더니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내 목소리에 놀랐나 보다. 달려가 아기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놀란 것도 달래주며 첫걸음마를 칭찬해 주었다. 돌이 지난 지 한참 되어도 걸을 기미가 없어 내심 신경이 쓰였는데 본인의 때에 용기를 내서 불쑥 걸어서 내 걱정을 일축했다. 한시름이 놓였다.
아기는 부모 특히 엄마의 사랑과 함께 걱정을 먹으면서 자란다. 제대로 잘 성장할 거라는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무리 담대하게 마음먹어도 아기의 무사(無事)를 향한 크고 작은 걱정을 스스로 피워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어린 생명을 제 몸을 통해 세상에 내놓은 자의 양심이고 본능적 사랑, 모성애이지 않을까 가늠한다.
걷기 시작하더니 곧 뛴다. 엄마, 맘마를 말하더니 문장을 엮어 낸다. 또한 카시트와 유모차 세상에서 놀이터를 시작으로 바깥세상 맛을 알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극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괄목상대하는걸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엄마는 마냥 아기의 성장을 흐뭇해하기만 할 수 없다. 아기의 생명과 안전의 수호자로서 매의 눈을 장착해야 한다. 아기의 신체능력과 호기심, 활동 범위가 왕성해질수록 그만큼 사고 빈도가 잦아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들은 아무리 온순하다고 해도 활동 반경이나 움직임의 각도가 커서 자칫 매의 눈의 경계를 늦추면 여기 쿵! 저기 꽝! 다쳐 울음이 터질 우려가 크다.
그러니 엄마는 아기가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노심초사 항상 긴장을 늦출 수가 없게 된다. 심지어 때로는 잘 때도 방심할 수 없다. 이불을 뒤집어썼는데 벗을 줄을 몰라 낑낑대는 변수가 있으니까. 하여튼 남편이 일터에 있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의 홀로 육아는 아기의 한없는 어여쁨을 두 눈 가득 담을 틈을 주는 것에 인색하다.
육아의 현실이 이렇다고만 하면 허탈, 부담, 억울하기 짝이 없지 않겠는가. 옛말에 아기 볼래? 한여름에 밭일할래? 하면 밭일을 자처한다고 할 만큼 아기를 돌보는 일은 에너지 소비가 상당한 중책이다. 왜 그럴까? 아기는 생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뙤약볕 아래의 밭일은 중노동이기는 하나 상대는 꼼짝 못 하는 무생물이다. 내가 무조건 조절, 통제할 수 있다.
반면에 아기는 그렇지 않다. 고유한 DNA를 가진 독립된 인격체다. 비록 신체능력과 지능의 발달이 완성되기까지 부모가 꽤 긴 시간을 돌보아야 하지만 아기는 스스로 자라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부모 또는 양육자는 그가 향하는 방향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아기 돌봄이 한시도 몸과 마음의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고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아들을 둔 지금까지의 내 삶을 반추하면 생명을 낳아 건강하게 키우는 일은 내가 잘한 일들 중에 상위를 차지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노력을 하여 이루어낸 것일지라도 자식을 낳아 밝고 건강하게 기르는 것의 의미와 가치와는 비교불가다. 다른 모든 성취는 의지와 노력으로 거머쥐고 딛고 서는 냉정한 기쁨이라면 육아는 오감을 표현하는 따뜻한 존재와의 한계가 없는 소통이다. 맑은 영혼과 교감하며 그로부터 얻는 교훈과 기쁨은 육체적 돌봄의 피곤함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
그러므로 육아는 결코 내 시간과 노력을 기울임에 밑지는 법 없이 오히려 얻는 게 더 많은 일인 것이다. 가끔은 엄마로서 내가 하는 일이 위대함과 숭고함에 가닿을만하지 않을까 쑥스럽지만 스스로 격려하기도 한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피어난다고 아기의 안녕을 위한 노심초사 중에도 어린 생명이 피우는 경이로움에 무한한 기쁨과 무장해제되는 평온이 찾아든다. 8할의 긴장과 걱정을 압도하는 2할의 기쁨과 평온으로 짧지 않은 육아의 길을 기꺼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인생사에서 이만큼 스릴 넘치는 이벤트는 드물 것이다. 해볼 만한, 해보아야 하는 값진 고생이고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