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iary 1

단편에서 장편으로

by 제퍼

이유나 동기가 무엇이든 취향은 변화한다. 그 순간은 영원불변일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만물은 제자리에 언제까지나 머무는 법이 없다. 강물과 같다. 흘러 지나간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그래서 결코~, 절대~라고 단정하는 것은 스스로도 신뢰할 수 없는 호언장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한때 내가 그랬다. 나의 책 읽기 취향은 그 스스로도 신뢰할 수 없는 호언장담의 단적인 예다. 그림책을 즐겨 읽는 연령을 넘으면서 자연스레 텍스트 비중이 높은 책들을 접하면서 나는 유독 한글이 빼곡히 들어찬 글을 읽는 걸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이야기 책을 선호했다. 사춘기를 관통하는 십 대 시절, 그 시기에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인 공상, 상상하기를 나 역시 습관적으로 했다. 그 습관은 독서 취향에서도 드러났다. 명확한 사실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 글들보다는 가공의 이야기에 자석처럼 끌렸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내 취향은 허구 지향이었다.


작가가 걸어놓은 마법의 상상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그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익숙한 듯했지만 생경했고, 낯선 것 같지만 친숙했다. 알듯 모를 듯한 이야기 전개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마음이 엮였다. 집-학교-피아노 학원, 트라이앵글 쳇바퀴를 단조롭게 오가던 십 대 소녀는 잠시도 쉬지 않는 파도의 일렁임 같이 가슴이 자주 울렁거리고,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는 허구의 이야기 세계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의 렌즈를 통해 굴절되어 비치는 각양각색의 인생과 세상은 어린 소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가 다듬었다가를 거듭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폭 좁을 수밖에 없는 청소년 시절을 내적으로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나만의 든든한 무기를 얻게 되었다. 무기라고 할 만큼 영향력 있는 그 세계에 더, 더 오래 머물고 싶었고 머무름의 여운이 상대적으로 큰 이야기, 장편 소설을 애호하게 되었다.


20여 페이지 내외의 짧은 이야기를 읽을 때 종종 뭔가 아쉬움 같은 걸 느꼈었다. 뭔가 타오를 것 같다가 사그라들고, 극에 달하기 직전에 일순 마무리되는 글 전개로 잔뜩 부풀었던 호기심과 재미가 풍선에서 공기가 빠지듯 수그러지는 게 내심 싱겁고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미숙하고 철없던 때라 단편 이야기의 맛을 볼 줄 몰랐던 탓도 있었고, 글의 길이와 형식상 그렇게 느껴질 만하기도 했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가랑비에 옷 젖듯 빠지게 된 장편 소설은 대다수의 단편에서 느꼈던 갈증을 채워주었다. 이야기 구성 요소들을 엮는 그물코의 수, 간격, 굵기들이 서로 다른 단편과 장편은 글을 읽는 호흡이 달랐고 몰입의 정도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어느 것이 더 낫다 차원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체감했던 것이다. 같은 소설이지만 읽는 맛이 달랐다. 새로운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은 이후로 그 맛만 한동안 찾게 되는 습성처럼 다른 묘미의 읽기에 휘감겼다.


그때 예감했었다. 앞으로 나의 장편 읽기 선호 취향이 꽤 오래 지속될 거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장담했었다. "Short Story로부터 Full-length Novel 취향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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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 읽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과 함께 중•고등학교 시기를 지나면서 의미 있는 관심사가 하나 더 생겼다. 영어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 입학 후 처음 영어 과목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알파벳부터 배웠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신선함과 활기를 불어넣었다. 문자의 모양, 소리, 문자들이 모여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와 표현들, 그것들의 발음, 그리고 그런 단어와 표현들이 어법에 맞게 제자리를 찾아 마침표, 물음표, 또는 느낌표로 어우러지는 논리적인 문장들을 익히는 과정은 경이로웠다. 그날 배운 단어들과 그 뜻을 연습장에 백 번씩 쓰는 숙제가 재밌었다. 발음을 입 밖으로 내며 스탠드 불빛 아래서 손목이 뻐근하게 A4용지 종이에 4열 종대로 영어 단어와 뜻을 쓰던 숱한 밤들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그 기억들은 내 입가에 미소를 달아준다. 훗날 영어 글 소리 내어 읽기 루틴의 전조이지 않았을까! 미미하지만 내 삶에 나름 어떤 획을 긋게 되는 암시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글 읽는 취향은 단편 이야기로부터 장편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모습을 제대로 갖춘 논리적인 영어 문장들을 읽고, 쓰고, 듣고, 말하고, 상상하는 이름하여 오감 자극 습관이 어렴풋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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