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트고; 자라서; 열매를 기대해

루틴이 선사하는 것들

by 제퍼

관계 정의어, 역할 지시어 같은 계급장 다 떼고 '나 아무개'로 하루를 살고 있나를 하루에도 여러 번 되묻는 나 자신이 나중에는 스스로 가엽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기상부터 취침까지 의지 상실인체 25평 남짓한 공간을 잰걸음으로 숨 가쁘게 오가느라 지치는 초보 엄마 증후군을 치유하는데 일등공신은 단연코 영어 소설 소리 내어 읽기 루틴이었다. 그 루틴은 현재 진행형이고 미래 진행형이리라 감히 선언한다. 사소한 루틴이 막강한 리츄얼이 되게 한 선물들을 소개한다.


하나.

시공간에서의 보이지 않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났다. 내 시간이고 내 공간인데도 무형의 힘에 종속되어 사는 것 같은 불안함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시간은 제 속도로 흐르고 공간의 모습이 바르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등 뒤에서 환한 기운이 나를 향해 비추었다. 심신이 따뜻하게 릴랙스 되었다. 그제야 내가 보였다. 옹송그려 있던 나는 동면에서 깨어난 듯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거울 속에, 거실 통유리에 비친 나는 나른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다름 아닌 내가 거기 있었다. "그래, 저게 바로 나였지. 찾아서 다행이다."


영어 소설 소리 내어 읽기는 수시로 힐링 포인트가 되어 주고, 때로 흔들리고 헤맬 때 넌지시 가리키는 나침반이고 등불이고, 그리고 나의 길을 나답게 가도록 옆에서 때론 한 발 뒤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방향을 잡아주고 변화시키는 산들바람(Zephyr)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망치가 내 머리를 탕 치는 느낌이었다.


반사적으로 아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이고 싶은지도 알았다. 그를 위해서도 옆에서, 조금 뒤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방향을 잡아주고 변화시키는 시원하고 상쾌한 산들바람, 제퍼가 되기로 했다. 영어 소리 내어 읽기 루틴은 나 자신과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준 것이다. 일거양득 했다. 그리하여 내 브런치 이름 제퍼(Zephyr)가 탄생했다.


둘.

영어 실력이 향상되었다. 영어를 배우고 익혀온 세월에 비하면 읽기를 빼고 듣기, 말하기, 쓰기 실력은 그만그만했었다. 그간 쉬지 않고 책을 통해, 각종 듣기 학습 툴 사용, 회화 연습을 손 놓지 않고 해왔어도 읽기와 나머지 셋 사이의 불균형 조정은 답보 상태였다. 모름지기 언어는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주야장천 input만 하고 output 할 여건이 어렵다 보니 그 불균형은 당연지사다.


내 경우 읽기에 대한 갈증의 정도가 압도적으로 높아서 더욱 편중된 상태에 처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절실한 이유로 매일 초집중하여 영어글을 소리 내어 읽기를 했더니 놀랍게도 의도치 않았는데 리스닝 실력이 부쩍 늘어난 것을 발견했다.


16년 된 루틴 속에서 정확하게 언제부터 그런 변화가 시작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굳이 방법이라면 글의 내용과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 문장과 단락을 의미 단위로 끊어 읽어 머릿속에 그림으로 입력하였다. 그냥 나도 모르게 그렇게 읽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통번역 전문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나의 읽기 습관이 전문 용어로 parsing을 실천한 것임을 알았다. 좀 신기했다. 과장하여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읽은 방법이 알고 보니 전문적인 skill이라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CNN, BBC, Bloomberg TV 채널의 빠르고, 다양한 발음들이 어느 날 의미 덩이로 나뉘어 들리기 시작했다. 어려운 내용이나 전문적인 단어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 뿌옇게 들리지만 들은 것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와닿았다. 이는 소리 내어 읽기 루틴이 가져온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언어 학습에서 들려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맞다. 잘 들으면 제대로 말하게 된다. 영어로 말할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말하기도 훨씬 편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쓰기 실력 향상도 빼놓을 수없다. writing 할 때 단어와 표현을 보다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선택하고 글의 성격에 맞게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이 좋아졌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으로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단순하게 시작한 영어 소설 소리 내어 읽기가 쌓여 발하는 시너지 효과에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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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우리말 실력이 곧 외국어 실력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실감했다 아니 절감했다. 매일 최소한 신문 기사 세 편 읽기와 다양한 분야의 한글 책 읽기를 꾸준히 병행하는 것은 우리말 실력을 키우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풍부한 우리말 실력은 영어뿐 아니라 어떤 외국어를 익히는데 든든한 자양분이 되는 게 분명하다. 외국어 표현의 정확한 이해가 어렵거나 외국어로 표현하는 게 막힐 때 우리말 표현을 많이 알고 있으면 추측, 연상 작용을 통해 외국어의 의미를 감잡을 수 있고 적절한 말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결국 우리말을 잘 아는 것은 외국어를 잘할 수 있게 하는 든든한 백 그라운드다.


넷.

나를 잃지 않고 단단하게 찾아나가게 되니 때론 힘겹고 조금은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던 견장들(엄마, 아내, 주부 등의 사회적 역할)의 무게를 견디기 수월해졌고 그 관계들에서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잦아졌다. 외부로부터 나를 지키고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 타인과의 관계 형성과 유지에 그리고 세상을 향한 시선에 관용의 미덕을 품을 수 있는 덤을 얻었다. 영어 소리 내어 읽기는 나를 지키는 방패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솔루션인 셈이다.


잠긴 문을 여는 방법은 가지다. 열쇠로 연다; 문을 두드려 안에 있는 누군가가 열어 준다; 부순다. 삶에서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한지 모르겠다. 내가 주체적이라면 그런 묘법이 작용한다는 믿음은 반세기를 넘게 살면서 터득한 지혜다. 영어 소설 소리 내어 읽기는 내게 그 지혜에 버금가는 자산이고 살아내는 것에 대한 근사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