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
낯선 곳에서 살아보는 경험은 나를 더 잘 알게 해 준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이 내 삶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못 견뎌하는지. 그런 것들을 아는 것만으로 조금 더 쉬운 나날들을 보낼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이곳에 와서 예상치 못하게 나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고 간다.
처음에는 단지 익숙하지 않고 불편해서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 내게 그것은 ‘영어’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졌다. 일반적인 대화 역시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질수록 괜찮아진다. 그러고 나니 5개월쯤 되었을 때(학기가 끝나고 떠날 때가 되었을 때)는 이곳에서 떠나기가 무척이나 싫었다. 평화로움과 여유로움. 한국에서는 쉬이 느낄 수 없는 시간, 공간에 대한 여유로움들이 장점으로 보였다. 그래서 심지어 졸업 후 대학원이나 일자리까지 이곳으로 올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는 잠시 이곳을 떠났다. 비자 문제로 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열흘 정도 지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에는 잊고 있었던 단점들이 하나둘씩 표면 위로 떠올랐다. 첫 재로는 가끔 도를 지나치는 여유다. 뭐든 양면성이 있는 법이라고 여유가 있는 삶이 그렇게 늘 좋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가끔은 정말 답답하고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많다. 시간 약속을 하면 제대로 지키는 일이 드물고, 그리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친구와 대화를 끊지 못해서 길거리에 서서 한참을 대화를 나눌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조급해하거나 말을 끊으려고 하지 않을 때. 급히 할 일이 있거나 바쁜 일이 있는데 그럴 때면 가끔 화가 올라오기도 했다.
또 하나는 음식이다. 한식 없으면 죽고 못 사는 나에게 한식이 없는 삶은 너무나 괴로웠다. 재료를 사서 만들어 먹을 수는 있어도 재료를 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더군다나 내가 지내던 곳은 아시안 식당이나 큰 마트를 가려면 1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을 운전해서 가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있는 아시아 식당은 한국에서 먹는 음식들만큼의 맛이 나지 않았다. 매일 적어도 두 끼는 한식을 먹어야 했던 뼛속까지 한국인에게는 음식의 다양성이 부족한 이곳의 삶이 가끔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던 사람이 웃으며 안부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활짝 웃으며 ‘How are you?’ 하고 물어주는 것만으로 금세 마음에 담요가 한 겹 덮어지며 불편했던 점들을 슬쩍 가려준다. ‘이 정도면 살만 하다.’라는 생각은 다름 아닌 모두 사람 때문에 든다. 사람, 사람, 그리고 사람.
여름 두 컵을 다 채우고 다시 돌아갈 날을 앞두고 있다. 가능한 한 많이, 가능한 한 오래, 쌓아온 인연을, 초록의 마을을 내 머리에, 마음에 꾸욱 채워 담는다. 아쉬운 이별을 해야 할 시기가 또 한 번, 한 뼘 앞으로 다가온 지금 양면의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한국 음식을 먹을 생각에, 익숙한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편안하고 설레는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도, 다시는 보지 못할 이곳의 사람들에, 마을에, 이제는 또 다른 고향과 가족이 되어버린 모든 것들에 슬프고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곁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괜히 죄책감이 들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괜히 죄책감이 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두 마음 모두 가슴 한편에 자리를 차지할 권리가 있는, 정당한 마음이라는 것을.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두 가지 마음 그대로 마음속에 남겨 두기로 한다. 만남과 이별,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건을 맞이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리고 우리는 운이 좋게도 구태여 한쪽을 선택해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마음은 형태가 없기에, 여러 가지 감정을 모두 담아놓고 지낼 수 있을만 한 공간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그저 순간 떠오르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누린다. 그러다 보니 말로 형용할 수는 없지만 그 중간 어디쯤 잔잔한 지점에 머무른 듯한 기분이 든다. 사실 이것은 언제 휙 하고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변하더라도, 얼마큼 변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두기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지구는 하나고,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운이 좋게도, 지금은 그런 시대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운이 넘치는 삶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다시 돌아온 미국, 8월 장마와 함께 여름이 막을 내린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