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인간

#9 다시 돌아온 미국, 여름

by Zepline

나는 글을 쓸 때 손으로 쓰는 편이다. 사실 ‘쓰는 편이다.’라는 표현을 붙이기엔 이렇게 방식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로 정정하겠다. (언제까지 유지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방식이 나에게 조금 더 맞는 것 같다는 거다. 손이 조금 아프고, 그다음엔 어깨가, 무리한 날에는 가끔 팔이 저려 오기도 하지만, 가끔은 글씨를 못 알아볼 정도로 악필로 변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펜 촉이 종이를 스치며 만들어내는 이 느낌이 좋다. 이윽고 ‘써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좋다.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이들이 종이보다는 마우스를 잡고, 펜보다는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첨삭하거나 최종 제출하기 전에는 프린터를 해서 종이로 읽고 고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계속 막히고, 특히나 워드 프로그램의 특성상 옳은 문장이나 단어임에도 그어지는 빨간 줄이 나를 거슬리게 했다. 인물의 이름을 적었는데 왜 계속 빨간 줄을 긋는 건지. 그 줄이 마치 ‘어서 고쳐!’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펜을 들었다. 노트북 가방 안에는 습관처럼 가지고 다니는 얇은 무선의 공책 한 권이 있었다. 사실 시작은 막 쓰고 싶은 문장이 있었는데, 노트북을 열어 켜기엔 시간이 걸리고 그걸 기다리지 못해 공책에 휘갈겨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자판을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막힘없이 써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수정도 편했다. 꼭 어느 하나를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단어를 모두 적어놓고 나중에 선택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구겨진 종이가, 혹은 볼펜 자국이 난 종이가 여러 겹 겹쳐지면 그 종이의 무리를 넘길 때 나는 특유의 소리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한참을 쓰다가 되짚어보면 그 추억의 촉감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단어를 조합하는 방식이 아닌, 드디어 글을 ‘쓰는’ 제대로 된 느낌을 받았다. ‘그래, 나는 치는 게 아니라,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그렇게 또 한 가지 나에 대해 깨달았다.


이곳,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동네는 조금 더 아날로그스러운 면이 여러 가지 있다. 요즘 대부분의 서류를 패드와 같은 전자기기에 작성하는 방식인 한국은행과 달리, 이곳은 모두 종이, 펜을 가지고 수기로 작성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터넷 뱅킹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친구들끼리는 주로 현금을 사용하고, 1000달러가 넘는 금액을 보내려면 은행에 직접 가서 보내야 하며, 그 시간도 일주일에서 2주가 넘게 걸린다고 한다. 서류 하나를 처리하려고 해도 이것저것 직접 프린트해서 가져가야 하는 것이 많다. 온라인으로 클릭 한 번에 이것저것 다 이뤄지는 곳에 살다 온 나로서는 이것이 참 신기하면서도 잠시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스마트폰이 필요한 일이 그다지 없다. 연락 또한 그 방식이 꽤나 자유롭다. 우리나라처럼 카카오톡 같이 전 세대가 함께 이용하는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이 없기 때문에 주로 가족끼리, 혹은 급한 용무는 메시지나 전화를 이용한다. 또한 그룹별로 전달해야 할 정보가 있을 때는 메일을 통해 소통한다. 그러다 보니 의미 없는 문자들로 주고받는 연락이 없다. 해야 할 때만, 용무가 있을 때만 연락을 주고받는 편이다. 식당을 예약할 때도 온갖 애플리케이션을 쓰지 않는다. 그저 전화를 하거나 혹은 직접 방문해 목록을 작성하고 기다리는 방식이다. 원래도 또래에 비해 복잡한 휴대폰을 잘 사용하지 않던 나는 이 세계에 조금 더 편안함을 느낀다. 네모난 작은 화면에 익숙한 삶보다 사람 냄새와 종이 냄새가 나는 이 삶이 조금 더 편안하고 평화롭다.


지금도 역시 볼펜 똥을 열심히 생성해 내며 흰 노트를 채워가는 중이다. 이 촉감과 행위가 좋아 자꾸만 쓰게 된다. 질리지 않고 쓰게 된다. 촌스럽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좋다. 배터리도 필요 없고, 켜지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잊고 있던 즐거움을 이렇게 깨닫는다. 또 한편으로 아직까지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이리도 많구나 싶다. 한 때, 서울에서 친구들은 다 있는 배달 어플을 혼자 이용하지 않아 ‘나도 한 번 깔아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괜히 주변 사람들이 다 쓰니까 나도 한 번 써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직접 가서 포장은 해도 배달은 잘 이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환경이 바뀌니, 이제는 있어도 쓸 일이 없다. 아날로그 덩어리인 나는 가끔 혼자 너무 촌스럽고 귀찮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마치 회색 바탕에 초록색 점을 찍어 놓으면 그것만 톡 튀어 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정작 초록의 세상에 와보니, 나는 그저 많고 많은 초록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작은 점은 이제 보이지 않을 만큼 큰 섬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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