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다시 돌아온 미국, 여름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너무나도 익숙한 공간에서 새로운 광경을 발견하게 되는 날. 여름 동안의 미국에서 나의 대부분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을 먹은 뒤, 스타벅스에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10분 정도 차를 타고 오면 어디에나 있어 여기에도 있는 고마운 스타벅스가 나온다. 하지만 평생을 차보다는 두 다리를 이용해 다니던 내게 아침에 조금이라도 걷지 않으면 몸이 찌뿌둥하고 간지러운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저 조금 걷고 싶었다. 나의 본능이 그랬다. 처음에는 집에서부터 카페까지 걸어와 보려 했지만, 교통 체증이 있는 도시와는 다르게 인도보다 차도가 더 잘 되어있는 이곳에서 차로 10분 거리는 걸어서 50분 남짓한 거리가 되었고, 햄버거 유닛으로는 90F, 즉, 한국 기온으로는 32도 정도가 되는 뙤약볕 아래 그 시간을 걷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찾은 해결책이 차를 타고 와 중간 지점에서 내려 걷는 것이었다. 15분 남짓한 시간이 되었고, 그 시간은 내게 하루 중 온전히 혼자 쉴 수 있는, 가끔은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노래도 듣지 않고, 휴대폰은 잠시 가방에 넣어두고 온전히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런 시간이 내게는 참 필요했다.
그 짧은 길에도 다양한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늘 다니던 차도 옆에 난 인도를 따라 왔다. 그 길이 가장 눈에 익은, 익숙한 길이었다. 근데 문제가 있었다. 그 길은 유난히도 아침에 그늘이 들지 않는 길이었고, 나를 부라려 보는 태양을 온몸으로 다 받아내야만 했다. 그래서 도착하면 늘 기운이 쫙 빠졌고, 땀으로 옷이 다 젖어 있었다. (같은 기온이라도 미국은 유독 해가 뜨거운 것 같다.) 그래서 통하는 다른 길이 있는 지 찾아보기도 결심했다. 나는 늘 어느 도넛 가게 앞에서 내렸는데, 그 길 뒤쪽으로 사잇길이 있었다. 한번도 가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길이었다. 워낙 키가 큰 나무들과 건물들로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던 길. 어느 날 그늘을 찾아 그 길을 탐구해보고자 결심했다. 유심을 연장하지 않은 내게 지도는 없었고, 그저 발 닿는 대로 가볼 계획이었다. 그렇게 찾게 되었다. 그 길은 역시나 온갖 나무들에 덮여 그늘을 이루고 있었고, 한적하고 조용한, 나에게는 딱 걷기 좋은 길이었다. 차도였지만 차는 거의 다니지 않아 시골길 다운 분위기를 풍겼고, 횡단보도도 없어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매일 아침 나의 전용 길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발견했다.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며, 익숙한 것을 뒤로 두고 새롭게 도전해보며, 한참을 돌아다녀 보며. 오히려 더 햇빛이 그득한 곳으로 오던 날도 있었고, 길이 끊겨 한참을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러다 찾은 최적의 길이었다. 이제는 매일 아침 루틴처럼 그곳을 지나서 오는 게 습관이 되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던 곳이 가장 익숙한 곳이자 가장 좋아하는 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시간은 내게 많은 걸 일깨워 준다. 길은 오르막으로 시작되는데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할 때면 밤 사이에 굳어있던 몸이 채 풀리지 않아 다리가 무겁고 피곤한 느낌이 든다. 즉, 다리를 움직이는 게 가볍지 않다. 괜히 등에 맨 백팩이 거슬리고 자꾸만 바깥쪽으로 돌아가는 신발 윗부분이 신경 쓰이다가도 몇 번 고쳐 메다 보면 어느덧 오르막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된다. 조금 더 걷다 보면 어느덧 그런 찌뿌등함은 사라지고 온몸이 서서히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러다 보면 머리가 깨어나는 기분이 들고, 뒤이어 뇌가 활성화되는 기분이 든다. 그럼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오늘 쓸 글에 대한 내용, 시나리오 아이디어 등이 쏙 하고 떠오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카페에 도착한다. 도착하기 직전에 큰 도로와 맞닿아있는 치과 주차장이 크게 나있는데, 그곳 전광판에는 그 날의 기온이 표시된다. 전보다 높은 혹은 같은 기온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선선하고 뽀송하게 도착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 빨리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싶어진다. 무언가를 할 에너지가 생긴다.
그렇게 매일을 반복하던 어느 날, 다른 일 때문에 카페에 오지 못한 날이 있었다. 하루 종일 그곳에서 보낸 나는 당연히 카페에 올 수 없었고, 그 길 역시 걷지 못했다. 대신 친구네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는 별장에서 잔잔한 호수를 보며, 해먹에서 낮잠을 자며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걸 반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에게 하루 일정을 빼먹은 것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겨줬다. 이 흐름이 끊기면 어쩌지 싶은 마음에. 어렵게 잡은 좋은 습관을 잃게 될까 불안했던 것이다. 다음 날도 어김없이 그는 나를 도넛 가게에 내려줬고, 나는 같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독 구름이 껴 그늘이 많은 날이었다. 그 날, 나는 마법같은 일을 경험했다.
걷다가 문득 ‘어? 이곳에 이런 집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집이었다. 하루 사이에 집이 짠 하고 생겼을 리도 없고, 내가 이 길을 수도 없이 걸으면서 보지 못했을 리도 없는데,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집이었다. 집은 ‘ㄱ’자로 나 있었는데, 세로로 난 집 팬트리에서는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셨고, 가로로 난 집의 대문에서 나온 할아버지는 커피를 들고 나와 그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오래된 친구인 듯 보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적어도 2주는 넘게 이곳을 통해 다녔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심지어 그동안 그 길에 있는 집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본 적도 없을 뿐더러, 건물이 모두 낡고 허름해 보여서 누군가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버려지거나 주인이 없는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허름하고 낡아 보였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등장한 순간 그 집은 새로운 모습을 띠었다. 파스텔 톤의 페인트로 칠해진 작지만 아담한 집에 작은 소품들까지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가서는 역시 낯선 집 마당에 앉아있는 강아지를 보았는데, 이 역시 나는 처음 보는 풍경이라 낯설었다. 갈색 나무의자 위에 앉아있던 검은 강아지는 그 형체를 알아보기 위해 내가 조금 더 그 쪽으로 집중하게 만들었고, 그 역시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따라 바라보았다. 모든 게 원래 그곳에 있었는데, 내가 발견하지 못한 건지, 아님 정말로 새로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게는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소름 돋게 낯선, 하지만 긍정적인 기분이 들어 걷는 동안 왜 그런 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어제 하루, 단 하루 이곳을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뿐이었다. 오직 하루 동안 익숙한 패턴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있다 왔다는 이유로 익숙한 곳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매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 지루한 일이다. 하지만 흔히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 새로운 것은 없다고. 너무나 모든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쳇바퀴 같은 매일 똑같은 일상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고작 하루 동안 다른 곳에서 잠시 다르게 생활 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주 잠시 다른 곳으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그 하루 동안의 ‘벗어남’이 ‘쉼’이 되어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하루가 그리도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주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루라도 완전히 벗어나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온 스타벅스. 아직은 풀리지 않는 손에, 잠깐 굳어버린 머리에 가끔 가다 멈칫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발견한 기쁨, 그것은 내 안에 아직 남아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을, 한달을, 일년을 버틸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