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시간

#6 다시 돌아온 미국, 여름

by Zepline

나를 늘 보듬어주고 미국에서의 삶을 책임져 주고 있는 내 동반자 사자(American)에게는 사소한 낭만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느 날은 카페에 앉아있다가 내 얼굴에 붙어있던 속눈썹을 손수 떼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하던 일을 하려는데 손가락에 그것을 얹어놓고 가만히 들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어 내가 ‘왜?’하고 물으니, 속눈썹을 주웠을 때 소원을 빌고 날려 보내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나도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말이었는데, 실제로 해본 적은 없었다. 빤히 나를 바라보던 사자의 손가락 위의 작고 가벼운 속눈썹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속눈썹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그리곤 후- 하고 날려 보냈다. 그 작은 것에 희망을 한 번 걸어보며.


또 한 번은 작은 동전 때문이었다. 가끔 길을 가다 혹은 음식점 주차장에서 그가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인다. 무언가를 주워 올리는 그를 보면 그 손에는 작은 페니가 하나 들려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10원짜리 같은 건데 모양이나 크기도 비슷하고, 사람들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 잘 떨구고 줍지 않는다는 점도 비슷하다. 얼굴이 보이는 면을 헤드(머리), 뒷면을 테일(꼬리)이라고 부르는데 ‘헤드’ 면이 보이게 바닥에 떨어져 있으면 Lucky, 즉, 행운의 상징이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동전을 주워 내게 건넨다. ‘Lucky penny’ 하며 말이다. 만약 ‘테일’ 면이 위를 향해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럭키가 아니라며 다시 주워서 바닥에 도로 던져놓고 지나가는 거라고 했다. 그럼 누군가가 그 행운을 주워 가거나, 혹은 또 테일이 나오면 누군가가 또 던져 놓는 것이었다. 헤드가 위로 올라와 그것이 ‘럭키’가 되어 누군가에게 행운의 상징이 될 때까지. 사소한 동전임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비록 나는 그 행운을 줍지 못했지만, 언젠가, 누군가의 행운을 기원하며 다시 던져두는.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 작은 것을 어찌나 잘 찾는지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쳐도 꼭 빠짐없이 찾아내 내게 건넸다. 그다음부터 나도 길을 걸을 때 페니를 찾는 습관이 생겼다.


이처럼 사소하고 가벼운 낭만은 반복되는 삶 속에서 문득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깻잎 한 장만큼 아주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환상의 세계로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을 선물해 준다. 그것은 그리 클 필요도 없고, 대단할 필요도 없다. 럭키페니를 줍는 그 잠깐의 순간, 속눈썹을 앞에다 두고 가슴속 소원을 비는 그 잠깐의 순간. 그 찰나의 순간들을 갈피 삼아 지금을 기억 속에 기록해 둘 수 있다. 그것은 나이에 맞게 속도가 올라가는 시간을 조금은 천천히 흐르도록 도와준다.


언젠가 어디선가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나이가 많을수록 시간이 더욱 빠르게 흐르는 이유는 인간은 특별한 사건으로 과거를 기억하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사건을 접하는 경우는 적어지고, 일상적이고 똑같이 보내는 날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어릴 때 체감상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이유는 새롭고 특별하다고 느껴지는 날들이 많기에 기억에 남는 날이 많기 때문이라고. 이 말을 듣고 아주 공감이 되었다. 나 역시 아주 어렸을 때에는 별의별 기념일을 다 챙겼던 것 같다. 밸런타인데이, 빼빼로 데이, 화이트 데이 등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유치하게 친구들끼리 선물이나 편지를 주고받고 특별한 날이라 칭하며 함께 놀러 가곤 했었다. 학교에서도 체육 대회, 스승의 날 같은 기억에 남을만한 특별한 행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시간이 없어서’, 혹은 ‘쓸데없다.’는 이유로 그런 기념일들을 쉽게 지나쳐버리곤 했다. 사회에서도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는 횟수는 자연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다 보면 특별하게 기억될 수 있는 날들이 적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좋은 순간이 영원하길 바란다. 그래서 특별한 순간에 휴대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는다. 그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사진으로 남길만 한 순간들이 많아진다면, 가능한 한 많은 순간이 머리에 박혀 기억된다면, 나를 기억할 수 있는 날들이 늘어난다면, 시간이 조금씩 더 천천히 흐르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원한 삶이 아닐까.


적어도 그 이후부터는 나는 사소한 기념일을 챙겨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단한 활동이나 값비싼 물건이 아니더라도 한두 시간 거리의 가까운 곳으로 훌쩍 가벼운 여행을 떠난다든지, 가까운 사람들과 작은 선물이나 말들을 주고받는다던지 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내 시간을 조금 더 차곡히 쌓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것들을 '낭만'이라 이름 붙인다. 나는 그 단어가 그리도 좋다. 낭만이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낭만이 있는 삶이 그리고 좋다. 내게 특별한 순간들을 조금 더 많이 만들어주고,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에. 나의 오늘을 나의 올해를 나의 그때를 특별하게 남겨주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그와 함께 한 미국에서의 여름은 돌아보면 유난히도 길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끊임없이 낭만을 선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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