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다시 돌아 온 미국, 여름
그 나라에서 살아본다는 것,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를 알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보이지 않던 게 보이면 비로소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I see.’ ‘나는 본다.’ 고 직역되는 이 표현이 현지에서는 ‘알겠어.’ 라는 의미로 쓰이고, 알겠다는 말은 곧 ‘이해했다.’ 고 해석될 수 있듯이.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먹을 것에 진심인 나에게 가장 놀라웠던 것은 ‘Burger’의 범위였다. 우리나라에는 햄버거, 치킨 버거, 새우 버거 등 다양한 버거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소고기 패티’가 들어가지 않은 같은 모양의 음식에게는 버거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국 맥도날드에 상하이 버거와 불고기 버거가 있다면 이들은 전자는 치킨 샌드위치, 후자만 버거라고 부른다. 하루는 ‘친구가 어제 뭐 먹었어?’ 해서 '치킨 버거'를 먹었다고 대답했는데, ‘치킨을 먹었다는 거야, 버거를 먹었다는 거야?’ 해서 내가 다시 ‘치킨 버거를 먹었다니까.’ 하며 사진을 보여주니, ‘아~ 치킨 샌드위치~ 이건 버거가 아니야.’ 라고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햄, 즉, 소고기 패티가 들어간 것만 Burger 이라고 이름 붙이고 나머지는 모두 Sandwich 라고 부른다고 했다. 어쩐지 식당에서 샌드위치를 시키면 늘 수제버거처럼 생긴 음식이 나와 의아해했던 터였다. 당시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20년을 넘게 햄버거는 모두 버거, 즉, 맥도날드에 있는 메뉴는 모두 ‘버거’로 불러왔던 나로서는 조금은 억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에 캐나다에서 메뉴 판에 ‘치킨 버거’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겨우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해낼 수 있었지만, 여전히 미국 맥도날드 카테고리에는 상하이 버거가 '샌드위치' 카데고리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이질감을 느낀다.
‘서운하다.’,’속상하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이 문장들은 번역기를 돌려 봐도 딱 맞는 단어를 영어로 찾기가 어렵다. 그 대신 친구끼리, 혹은 연인끼리 다툴 때 ‘I'm disappointed. 나 실망했어.’, ‘I'm sad. 나 슬퍼’, ‘I'm angry 나 화났어.’ 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래도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서운하다는 말은 굳이 표현하자면 상대방의 태도, 행동같은 것에 조금 실망스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순간적인 화가 올라오면서 그 사이에 슬픔이라는 조미료가 약간 들어간 듯한 감정이 아닌가. 문득 의문이 든다. 그러면 이들은 ‘서운한’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걸까. 한 번이라도 그 감정을 느껴봤다면 그것을 표현할 단어가 파생되지 않았을까. 하는.
‘미워.’ '재수 없어.'
와 같은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미워.’는 조금은 가벼운 싫음의 표현이다. 진짜 상대방이 싫은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드는 앙탈, 애증 비슷한 느낌으로, 그 안에는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너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너가 싫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올라왔다.’ 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단어 역시 영어로 표현하자면 딱 맞는 번역이 없다. ‘I don’t like.’, ‘I hate you.’ 정도가 내가 떠올린 비슷한 문장이었는데, 하루는 내가 남자친구에게 ‘미워’ 하고 말하고 싶어 후자의 표현을 썼더니 크게 상처받으며 ‘Hate’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아주 증오하고 싫어할 때 쓰는 심한 표현이라고 일러주며 눈시울이 붉어졌고, 나는 곧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마치 한국어와 영어는 감정이 만들어지는 재료는 같은데 조리 방법이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그 조리 방법은 아무래도 태어날 때부터 자라온 환경과 식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겠지.
음식도 그렇다. 모든 재료를 비율을 맞춰 넣어 한번에 조리하면 그것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음식, 맛이 생성되는 대부분의 한국음식(ex. 비빔밥, 국밥, 야채곱창 등)과는 달리, 이곳의 음식은 제법 단순하다. 개별적인 재료가 각자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햄버거에서는 빵과 패티, 야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스테이크를 시키면 소고기 한 덩이와 사이드 감자 튀김, 이렇게 각 음식이 개별적으로 본연의 맛을 뽐낸다. 큰 한 솥의 음식을 여럿이 공유하는 것이 한식의 대표적인 문화인 반면에 미국에는 그런 류의 식당이 없다. 모두 1인분이고, 먹고 싶은 것을 따로 시켜 먹는다. 뿌리는 같지만 각자의 삶, 개별적인 것, ‘개성’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미국 사회와는 달리 한국은 함께하는 삶, 공동체적인 것, ‘집단’을 중시하는 사회가 그 중심에 있다.
한 번은 수업 듣는 미국인 교수님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시간이었는데, 누군가 피자를 사 놓았다. 신기했던 점은 그것을 자리에 두고 다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부엌에 두고 먹고 싶은 사람만 가져다 먹는 방식이었다. 당장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은 플라스틱 용기나 접시에 담아 싸가도 됐었다. 음료 또한 아무것도 제공되는 게 없었다. 각자 마시고 싶으면 사오고, 없으면 마는 걸로. 물 정도만 제공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한 번은 미국에 사는 한국인 목사님 댁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그분들은 우리를 위해 한상 차림을 준비해 주셨는데, 음식이 끝나지 않았다. 삼겹살 다음에는 비빔면, 그 다음에는 볶음밥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필요한 게 없냐며 이것저것 가져다 주시며 ‘많이 먹어.’라고 하셨고, 나는 미국에 와서 제일 많이 먹은 날이 그날이었다. 한국인 특유의 정과 푸짐함, 푸근함을 제대로 느꼈다.
지구 반 바퀴에 있는 대륙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이리도 다르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한국에 있을 때 이런 얘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연애할 때 질투가 없다는 아메리칸 마인드. 남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본인들 하고싶은대로 하고 산다는 류의.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질투하는 마음은 일어나지만 개인이 하고 싶은 것을 더 존중하는 거였고, 이들도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만 개성을 표하는 것이 우선 순위에 있을 뿐이었다. 환경이 조금 다를 뿐 본질은 우리 모두 '사람'이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그 기준이 조금씩 다른 것일 뿐.
양파와 대파는 본질은 ‘파’ 하나지만 생김새나 맛이나 쓰임새가 다르다. 하지만 분명 보면 비슷한 점이 있고, 그들은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 나와 ‘다르다.’ 하면 쉽게 ‘정반대’의 이미지를 떠올리고는 한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시험문제처럼 옮고 그름이 없다. 한국에서는 푸짐하게 내어주는 한 상 차림에, 나는 너와 달라도 너와 늘 함께 한다는 은연 중의 마음가짐에 따뜻함을 느끼고, 미국에서는 문을 열고 닫을 때 멀리 있어도 문을 꼭 잡고 있어주는 기다림에, 너는 너 자체로 존재해도 괜찮고, 굳이 맞춰야 할 필요 없다는 존중과 안심에 따뜻함을 느낀다.
하나로 뭉쳐있지만 까보면 여러 개의 겹으로 쌓인 양파와 뿌리는 같지만 언듯 보기에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대파는
오늘도, 같은 행성에서 함께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