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방학

#11 다시 돌아 온 미국, 여름

by Zepline

방학이라는 뜻이 무엇일까.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일정 기간 동안 수업을 쉬는 일. 또는 그 기간. 주로 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또는 더위, 추위가 심할 때 실시한다.' 라고 적혀 있다.

쉬는 일. 또는 그 기간. 그것을 우리는 방학이라 부른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학생들 중 온전한 '방학'을 누리는 자는 얼마나 될까.


미국에서 미국 대학교의 학생과 두 달 남짓한 시간동안 함께 살았다. 그는 이제 곧 4학년 1학기에 접어드는 학생이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학기가 끝난 5월부터, 학기가 시작하는 8월 셋째 주(미국은 9월이 첫 학기, 1월이 둘째 학기로, 5월 초에 2학기가 마무리된다.)까지 세 달 남짓한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와 무엇을 했느냐.


아침에 일어나서 빵을 굽고 계란을 구워 아침을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종종 빨래를 했다. 오전에는 잠깐 글을 쓰거나 커피를 마셨다. 점심은 맛있는 것을 먹었다. 간단한 요리를 하거나 간혹 먹고 싶었던 음식점에 가 사먹었다. 오후에는 Rec(Recreation center)에서 그는 교내 아르바이트, 나는 그곳에서 운동을 하고, 저녁을 먹었다. 가끔 영화를 보거나 노을을 봤다. 산책을 했다. 월요일마다 열리는 빙고 게임, 수요일마다 열리는 트리비아를 갔다. 가끔 주말에는 이 친구의 할아버지의 별장(호수 앞에 있어 'lake house' 라고 부른다)에서 보트를 타거나 멍을 때리거나 낮잠을 잤다. 나중에는 워낙 할 게 없어서 뜨개질로 인형 만들기도 시작(만) 해보았다. 아, 시리즈가 아주 긴 미드도 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넘쳤다. 인생이 참 길고 여유로워 보였다.


여름방학을 2주 정도 남겨두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친구들에게 근황을 물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가.


아침에 일어나면 대충 끼니를 떼우고 도서관에 간다고 했다. 혹은 아침 일찍 일을 하러 학교나 일터에 갔다. 자격증 공부를 하거나 일을 했다. 점심은 먹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했다. 저녁까지 하던 일을 하고, 식사를 대충 떼우고 운동을 한다고 했다. 유튜브를 좀 보다가 보면 하루가 끝나있다고 했다. 주말에는 시험을 본다고 했다. 누구는 운동을 하거나 가족을 보러간다고 했다. 시간이 없었다. 인생은 짧았다. 하루 빨리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이 보였다.


시계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들의 시간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시계보다 훨씬 더 바삐 흐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로 채우고 있었다. 그 사이에 껴있으니 나 역시 무언가를 해야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일었다. 하루 종일 텅 비어있는 시간이 왜인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지난 몇 주동안, 아니, 몇 달 동안 그렇게 지내왔는데. 갑자기 그 공백의 시간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자 끊임없는 '무료함'이 찾아왔다. 이것이 물살에 휩쓸린 불안감 때문인가, 혹은 외로움 때문인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던 누군가와의 연락에 집착하게 되고, 무얼 해도 재미가 없었다. 워킹 데드를 봐도, 뜨개질을 해도, 책을 읽어도. 느껴지던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더 의미있는 것, 도움이 되는 것, 활용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할 것만 같았다. 자격증 공부, 취업 준비.


고작 2주였다. 2주 뒤면 바쁘게 학기가 시작될 터였다. 학교도 가야하고, 아르바이트도 시작될 터였다. 졸업 학기라 졸업 준비도 할 예정이었다. 고작 그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뒤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기 전에는 뒤쳐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는데, 이곳에 오니 나는 훨씬 더 뒤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사이에 시간이 바꼈을 리도 없는데. 내 상황이, 나이가 바꼈을 리도 없는데.


'방학'

한국에 있을 때는 방학이 되면 무언가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학기 중에는 학업에 집중해야 하고, 방학에는 뭐든 준비를 해야한다고. 자격증을 따던지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하던지. 나 같은 경우에는 소속되어 있던 동아리에서 연극을 꾸준히 올렸다. 그렇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다. 의미가 있어 보이는 일들을. 미래 언젠가에 도움이 되어보이는 일들을.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모두가 그렇게 사니까. 모두가 그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저마다의 삶을 너무나도 바쁘게 살아가니까. 그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 그것에 금이 간다.

금이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간 부숴진다.

그리고 그것이 부숴지면 비로소 새로운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방학은 조금 달랐다. 꾹꾹 채워넣기보다는 여백을 두었다. 두세달 남짓한 방학만큼은 일 년 중 빈칸으로 남겨두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해야할 일은 하되, 자기 앞가림은 하되, 꽉 차지 않을 정도로만. 공백이 보일 정도로만. 지나가는 시간을 그렇게 지나가도록 두었다. 그 안에서 얻는 것이 분명이 있을 것이다. 사랑, 여유, 안정과 같은 것들.


마라톤을 할 때 페이스 조절을 해야 오래 달릴 수 있다. 빠르게 달리는 구간이 있으면 쉬엄쉬엄 가는 구간도 있어야 끝내 완주할 수 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이 그런 것 같다. 욕심내어 단거리처럼 한 번에 온 힘을 쏟아 달려버리면 결승전에 다다르기 전에 지쳐버리고 만다. 나는 그런 꾸준함이 좋다. 조금 더디더라도 서툴더라도 빈 칸이 있는 삶이 좋다. 그 빈칸에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웃음을 채우며 그렇게 살아가는 삶. 오래오래 그렇게 살고 싶다.



"너네는 방학에 주로 뭐 해? What are you doing during vacation?"

"음, 딱히. Nothing."

"아무것도 안 해? Nothing?"

"응. Yes."

"왜? Why?"

"방학이니까. Cause It's va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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