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와 눈치
중국집에서 배부르게 밥을 먹은 두 사람은 산책로를 걸으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음식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사라지던데. 난 너 진공청소기인 줄 알았어.
으아, 나 지금 배불러서 힘들어.
걱정 마, 안 뺏어 먹을 테니까 앞으론 좀 천천히 먹어.
오랜만이라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근데 아까, 친구끼리 다투는 이유를 ‘당연하게 생각해서’라고 했잖아. 그거 말고 다른 이유도 있어?
뭐든 당연하게 여기면 그게 강요로 이어지기 쉬워. 강요는 수많은 ‘비매너’ 중 하나일 뿐이고. 결국 사람 사이를 망치는 진짜 범인은 이런 비매너인 거 같아.
그럼 친구 사이에도 매너가 있어야 안 싸운다는 거네. 근데 매너가 예의랑 거의 같은 말이잖아. 친구끼리 깍듯하게 예의 차리는 건 좀 징그럽지 않아? 어색하기도 하고.
장례식장에서 검은 옷을 입거나 버스에서 조용히 통화하는 걸 흔히 매너라고 하잖아. 그런 매너가 왜 생겼다고 생각해?
장례식장에 밝고 화려한 옷이나 나들이 옷을 입고 가면 유가족은 상대가 기분 좋아 보이니까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겠지. 버스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면 주변 승객 기분은 엉망이 될 테고. 결국 상대 감정을 긁어놨으니 자칫하면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할 거고.
흔히 매너라고 하면 영국 사람이 차 마실 때 우아하게 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잖아? 근데 현실에서 매너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려고 정한 게 아니라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들어서 싸우는 걸 피하려고 정한 ‘안전장치’에 가까워.
그렇구나. 그럼 혹시, 내가 친구한테 막 대했는데도 그 친구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으면 그건 비매너가 아닐 수도 있겠네?
원래 친구한테 “돼지야”라고 부르는 건 보통 비매너로 보이는 행동이야. 그래도 그 말이 둘만 아는 애칭이고, 듣는 친구도 오히려 재밌게 받아들이면 그 사이에선 비매너라고 하긴 어렵지. 문제는 사람 기분이 매일 똑같지 않다는 거야.
사람이라면 당연하지.
만약 다음 날 그 친구가 병원에서 비만이라는 진단을 받고 많이 우울할 때, 예전처럼 절친이 장난으로 “돼지야”라고 부르면 어떻게 될까?
그날만큼은 크게 화낼 수도 있겠는데?
이런 경험은 웬만하면 다 한 번씩은 있을걸? 늘 똑같이 대하는 걸 ‘일관성’이라고 하잖아. 근데 사람은 일관성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어서 문제가 돼.
근데…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으면, 결국 일관성이 없는 거 아니야?
조금 애매하지?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5살부터 10살까지는 짱구 캐릭터를 좋아하고, 11살부터 15살까지는 코난 캐릭터를 좋아했다고 해 보자. 5년만 놓고 보면 한동안 계속 같은 걸 좋아한 거니까 일관성이 있어 보이는데, 10년으로 길게 보면 취향이 바뀐 거라서 일관성이 없다고도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길게 보면 사람 마음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거야?
길게 볼수록 일관성 없는 사람 마음이 잘 드러난다는 거야. 물론 짧은 기간에도 사람 마음은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중국집 들어가기 전엔 내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오니까 이젠 마음에 들었잖아?
그다지 딱히…
아잇!
아… 맞아 맞아, 이제 밉지는 않아. 근데 왜 갑자기 일관성 이야기가 나와?
“선 넘지 마”라는 말 들어 봤지? 그 ‘선’은 상대가 무례한 행동을 할 때, 내가 참고 넘어갈 수 있는 한계선이라 보면 돼. 문제는 내 기분에 따라 이 선의 위치가 한결같지 않고 자주 바뀐다는 거야.
기분 좋은 날은 선이 저 멀리 있어서 웬만한 장난은 다 세이프인데, 기분 나쁜 날은 선이 코앞까지 와서 조금만 건드려도 아웃! 뭐 이런 거?
그렇지. 돼지야 사건처럼, 똑같은 말을 했는데도 어제는 상대가 웃었는데, 오늘은 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는 거야. 절친이라도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 둘 사이가 매우 나빠질 수 있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간단해, 선 바로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돼지야”라는 표현을 안 쓰면 돼. 그런 말을 꼭 써야만 절친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럼 친구끼리 웃기려고 무리수 두는 것보다, 조금 재미없어도 매너 지키는 게 훨씬 낫겠네.
사람마다 원하는 친구 분위기는 다를 거야. 그래도 난 어느 날 갑자기 절교할 것 같은 불안한 사이보다, 오래 가는 안정적인 사이가 좋아. 게다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막말하며 지내는 친구 사이는 바라지 않아.
나도 지킬 건 지켜주는 사이가 좋아. 근데 현실에선 오히려 내가 매너 없이 굴 때가 있어서 그게 문제야.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럴 때가 있거든.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래. 일부러 비매너를 저지르는 경우는 드물어. 그냥 무심코 튀어나오는 거지.
‘돼지야’ 사건에서 나왔던 그 눈치 없는 친구처럼, 나도 비슷해.
매우 친하다고 해서 속마음을 항상 전부 다 말하는 건 아니잖아. 절친 사이라도 상대 마음을 어느 정도 알아채는 눈치가 필요해. 전에, 상대 표정이 안 좋은데도 계속 개인적인 질문을 끈질기게 하는 사람을 본 적 있어. 아무래도 그 사람은 ‘자신이 궁금한 게 있으면 당연히 물어볼 수 있지’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하지만 눈치가 없으니까 자기가 상대에게 상처 주는 걸 전혀 모르더라고.
내 요구를 당연하게 여기고, 상대 마음에 관심이 없으면 눈치 없는 비매너인이 되는구나. 난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은데.
눈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당연한 생각을 줄이는 건 기본일 거고, 상대 마음을 엿볼 줄 아는 게 필요하겠지.
그걸 어떻게 보냐고… 투시 능력이라도 있어야 하는 건가?
상대 마음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 조금 쉬워져. 상대가 기분 좋을 때는 몰라도 돼. 하지만 나쁜 기분은 눈치채야 해. 대화할 때 상대 표정이 어두워지거나 말이 짧아지는 걸 알아챌 수 있어야겠지.
으음, 상대가 대놓고 화내면 알겠는데, 겉으로는 그냥 가만히 있고 살짝 기분만 나빠 있으면 알아채기 힘들던데.
서로 잘 모르는 사이에선 상대 마음은커녕 표정조차 읽기 어려워. 최소한 평소에 잡담을 조금이라도 나눴던 아는 사이는 돼야 표정을 보고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지.
하긴,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마음까지 엿본다? 그건 말이 안 되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결국 상대 마음에 관심을 갖는 거야. 사람은 대개 눈앞의 상황에만 신경을 더 쓰고, 정작 상대 마음에는 관심을 잘 안 둘 때가 많거든. 평소엔 밝게 이야기하던 친구가, 오늘은 말투가 차갑다고 해 보자. 상황만 보면 ‘나한테 화났나?’ 하면서 괜히 서운해지기 쉬워. 하지만 상대 마음에 관심을 두고 조심스레 대화하면 “집안일 때문에 좀 힘들어”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 이렇게 되면 위로가 필요한 친구 마음을 내가 눈치채게 되는 거야.
음… 눈치를 키우려면 그냥 관찰력만 좋아선 안 되겠네. 서로 얼마쯤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하고, 상대 마음에 신경을 많이 쓸수록 눈치도 같이 좋아지겠구나.
상대 마음을 알아채는 일이 워낙 쉽지 않은 데다가, 표정이나 기분을 일부러 잘 숨기는 사람도 있어서, 내가 신경을 써도 눈치 없이 행동할 때는 언제든 생길 수 있어. 그럴 땐 뒤늦게라도 솔직하게 사과해서 일이 더 커지지 않게 하는 게 좋겠지.
난 앞으로 눈치 보는 연습을 좀 해야겠어. 근데 흔히 ‘눈치 본다’는 말은, 괜히 상대를 살피면서 비위 맞추는 뜻으로 들릴 때가 있잖아.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라” 이런 말도 있고.
불안한 마음으로 눈치를 볼 때도 있긴 해. 하지만 우리가 말한 눈치는 상대를 배려하는 센스 같은 개념이야. 당당하게 사는 것도 내 마음대로만 살라는 말이 아니라, 너무 두려운 마음으로 살지 말라는 뜻인 거고. 어떤 글에서 봤는데, 목표를 향해 갈 때는 눈치 보지 않고 가도 되지만, 사람과 함께 지낼 때는 눈치가 꼭 필요하대.
너 갑자기 똑똑한 사람이 된 거 같아. 낯설어.
자, 오늘 결론. 매너랑 눈치만 잘 챙기면 친구 사이 오래 간다. 이해하셨습니까, 지수 학생?
네, 근데 선생님이 제일 먼저 재시험 보셔야겠어요.
에이, 왜? 설명 괜찮았잖아?
설명은 좋은데… 정작 바로 옆에 있는 사람 마음은 까막눈이시길래.
옆에 있는 사람 마음? 그게 누군데?
아냐, 됐어… 오늘 진도는 여기까지 하시죠. 눈치 좋은 선생니임.
힌트 한 번만…
사람 마음은 늘 같지 않아서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좋던 사이가 갑자기 싫어지거나 어색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눈치 있게 상대를 조금 배려하면 괜히 사이가 틀어지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이 인간관계에서 나름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매너와 눈치는 친구 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중요합니다. 가족 사이에도 ‘선’이 있어서 그 선을 자꾸 넘으면 오래 남는 상처가 생깁니다. 집에서 말과 행동이 너무 심하다고 느낄 때는 서로에게 높임말을 쓰고, 한 번 더 예의를 챙기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친구 사이는 큰 괴로움을 참으면서까지 붙잡아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서 작은 다툼으로도 깨질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큰 다툼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애인 사이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화해하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친구 사이는 그런 일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매너와 눈치로 다툼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다툼이 전혀 없는 관계는 없습니다. 다투고 난 뒤에 화해하는 방법은 뒷부분 《연인에서 위기에 강한 연인으로 1, 2》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매너와 작은 배려를 주고받으며 오래 가는 절친 남녀 사이가 되었다면, 이제 한 단계 더 가까운 ‘연인’으로 나아갈 차례입니다. 그러려면 무엇을 주고받아야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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