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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May 17. 2023

시간을 잊은 은밀한 술집, The Bookstore.

그렇게 동이 트고,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작품이 탄생하는 밤이다.

외지지 않은 골목에 위치했음에도 무척이나 외롭고 은밀해 보이는 오래된 문, 그 너머로 자연스럽게 시공을 초월한 다른 세상이 열리는 곳들이 있다. 우리가 펜실베니아에서 들른 비밀 술집(Speakeasy bar)도 그랬다. 1920년대 미국에서 금주법망을 피해 불법으로 술을 팔던 곳을 Speakeasy라 불렀는데, 현대에 와서는 그 시절의 스타일과 분위기를 재현하는 곳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변화했다. 


밀입한 술을 몰래 마시러 가는 기분으로 들르는 곳인 만큼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느낌이 각별하다. 건물 외벽 움푹 파인 공간, 검은 벽에 검은 문. 눈높이에는 파리인지 벌인지, 혹은 나비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떠한 곤충의 형태가 크고 거칠게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 손글씨로 "The Bookstore"라 적혀있었다. 서점. 밤의 서점. 이 밤이 쓸쓸한 이들에게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곳. 


문을 두드리자 1920년대 배경의 미국영화에서나 본듯한 단정한 차림의 여인이 나와 환영인사를 건넸다. 프런트의 분위기 역시 지난날의 미국이다. 붉은 갈색의 작고 고풍스러운 소파가 눈에 띄었다. 흰 와이셔츠에 커다란 검은 나비넥타이, 검은 정장 조끼와 바지까지 모두 갖춰 입은 키 큰 청년이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시간이 멈춘 듯 한 좁고 어두운 공간 구석구석, 수납이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에든 오래된 성경이나 백과사전을 연상시키는 두껍고 오래된 책들이 꼼꼼히 들어차 있었다. 


책이 쌓여있는 곳마다 중세 유럽풍의 커다란 은색 촛대가 여럿 눈에 띄었다. 타고 있는 초는 없었다. 전부 타고 또 타버린, 처음의 모양과 크기가 짐작조차 가지 않게 우락부락해진, 지저분한 백색의 키 작은 양초들이었다. 바닥까지 마냥 속절없이 흘러내리다 불투명한 하얀 눈물처럼 박제되어 버린 굳은 촛농의 흔적. 온당한 슬픔을 품은 낭만이다. 늦은 밤 양초가 모두 타버릴 때까지 이야기를 쌓는 곳. 조용하고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아무도 잡으려 들지 않는 곳. 모두가 서로의,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정신을 빼앗겨, 밤새도록 녹아 흐르는 촛농이 바닥으로 향하는 먼 길을 기록하며 눌어붙도록 내버려 두는 곳.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떤 행위에 몰두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은밀하고 내면적인 축복이다. 이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 개념으로는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Mihay Csikszentmihalyi)가 제시한 '플로우'가 있다. 한 가지 활동에 완전히 몰두하여 주변 환경이나 시간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는 최적의 경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온전히 빠져들어 다른 시공간을 여행하는 것, 형체 없는 마약이다. 잡념 없이 고립된 플로우 상태에 빠져 시간을 게걸스레 집어삼키고 있을 때엔, 몰입한 대상을 파고들어 탐구하고 손에 넣고자 하는 열정인지 아니면 몰입 자체가 주는 쾌락에 매료된 것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이든 몰입하는 것을 좋아하여, 플로우 발생 시의 무아지경의 상태를 즐길 뿐만 아니라 필요로 한다. 어릴 적부터 유독 집중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집중력이 좋아서 몰입을 즐기게 된 것인지 아니면 몰입을 좋아하기에 집중력이 상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지적 호기심과 성취 욕구가 큰 아이였을 수도 있을 테지만, 뭐든 쉽게 몰입해 버리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다양한 분야에 성취도가 높아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몰두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매며 살다 보니 지적 호기심과 성취 욕구가 큰 어른으로 성장한 것에는 틀림이 없다. 


플로우 상태에 빠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미하이는 주장한다. 본인에게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도전이어야 하고, 집중할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있어야 하며, 피드백이 즉각적이어야 하고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도움이 되게끔 친절하게 풀어주어서 어렵지 않게 들리지만, 조건을 일부러 하나씩 억지 충족시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온갖 것이 적시 적소에 있어줘야 하는 것인데, 이런 걸 보통 운에 맡긴다 하지 않나. 


이론적인 접근보다는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져보는 것이 최선이다.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흔한 말에 논리가 뒷받침되는 것일 뿐이기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재미있는 게임에 열중하다 보면 어떻게 하루가 다 지나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고,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것이고, 없는 시간도 만들어 내게끔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플로우의 발생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플로우는 그 경험의 순간만큼은 온전히 사랑에 빠지는 것의 안전을 보장한다. 근심 없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몰두하면 그걸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날 밤의 The Bookstore, 밤의 서점은, 플로우가 옛 미국 감성의 품격과 낭만이 있는 술집 공간으로 구현된 곳이었다. 사방에 빽빽이 들어찬 오래된 책들은 이곳이 서점인지 술집인지, 내가 있는 장소의 정체성을 흐려놓았다. 책도 술도 좋아하는 나에게 이곳은 품위 있는 놀이터였다. 하염없이 타오르며 굵고 뜨겁게 울어댄 양초들의 흔적이 경직된 시간을 해방시켰다. 1초가 영원인 듯 머물렀고, 동시에 영원처럼 긴 시간도 순간처럼 짧았다.

 



검은 문이 열리고 프런트를 지나, 테이블로 안내받는다. 어두컴컴하여 옆 테이블에 앉은 이들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로맨틱하고 구슬픈 라이브 재즈가 감정의 울림을 증폭시킨다. 테이블 위에 놓인 오래된 소설 같은 책을 펼쳐 훌륭한 술과 식사를 한 자 한 자 곱씹어 읽는다. 독한 활자가 몸 안에 퍼지며 절제된 마음이 울컥함에, 비밀스럽고 진솔한 이야기를 휘갈겨 써내기 시작한다. 불필요한 상념이 낄 곳은 없었다. 그렇게 동이 트고,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작품이 탄생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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