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테면 보라지, 웃을 테면 웃으라지, 욕하려면 욕하라지.
얼마나 오래 멍하니 있었을까. 벌거벗고 앉아있는 것과 다름없는 기분이었다. 강의실은 조용하고 밝아 도망칠 곳이 없었다. 시간이 백 년쯤 지난 것 같았지만 정작 시계를 보니 시험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뿐이 지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 맨 몸의 나는 어쩐지 용감해졌다. 볼 테면 보라지, 웃을 테면 웃으라지, 욕하려면 욕하라지.
그곳에 계속 앉아 오갈 데 없는 마음으로 시간만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맞아야 할 매라면 빨리 맞는 것이 낫다. 내가 갇힌 상황과 장면을 빨리 바꿀수록, 내가 현재 볼 수 없는 다가올 미래의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된다. 지금 이곳에 없는 회생의 기회는 이다음 챕터에 있기를 기대해 볼 수밖에 없기에, 위기에서 필요한 건 정지버튼이 아닌 재생버튼이다.
여러 장의 시험지를 챙겨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님이 있는 교실 앞문 방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의문 어린 시선들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벌거벗은 내 모습은 크게 주목받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내 모습을 주시하는 낯선 푸른 눈이 있었다. 최대한 눈을 피하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백지 시험지를 제출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득한 마음으로 입을 여는 순간 그가 나를 향해 시험지를 집어던졌다.
그 후에 어떻게 교실을 빠져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출한 시험지가 다시 내게 날아오는 순간, 나의 머릿속은 시야를 가린 종이만큼이나 하얗게 텅 비어버렸다. 강렬한 오후의 태양이 폭발하는 것을 맨 눈으로 마주한 느낌이랄까. 그냥 나왔는지, 대화나 언쟁이 있었는지, 다른 학생들은 어땠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기억을 잃어서인지 생각보다 감정적인 타격도 적었다. 애초에 백지 시험지는 수업에 예의가 아니니, 그가 화가 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표현방법의 폭력성은 옳지 않았으며 나 역시 답답하고 억울했지만, 백지를 제출해 놓고도 뻔뻔하게 낙제를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옳고 그름이 나 억울함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행히도 학교는 사회와는 참 다르다. 특히 미술대학은 기본적으로 학생이 창의적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며 성장하기 위해 학비를 내는 곳이기 때문에, 교수가 학점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그 범위는 제한적이다. 상대적 약자의 모자란 영어와 부족한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고, 의도가 올곧고 배움에의 의지가 있다면 대부분 수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울타리 안에서 굴곡 있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나 자신의 미국 사회 안에서의 언어문화적인 미숙함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지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후에 그를 다시 찾아가 최대한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고 사과했다. 리포트 같은 것으로 대체하여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고, 생각보다 더 흔쾌히 이해와 승낙을 받아내었다.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낙제를 면할 방법이 생긴 것도 그렇지만, 덕분에 나는 답 없는 위기에는 진솔함이 최선이라 여기게 되었고, 그 어떤 상황도 거짓말로 극복하지 않는 사람으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