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진짜가 없었다. 이해한다고 해도, 이해 못 한다고 해도, 칭찬을 받아도, 욕을 먹어도, 사랑한다 해도, 사랑받는다 해도, 그 어느 곳에도 진짜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뒤에만 있는 것이 싫었다. 내가 나로서 빛나면 그걸로 충분하길 바랐다.
나를 빛나는 보석으로 봐주는 사람 혹은 집단을 찾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았던 순진한 세월들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나도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는데 그걸 몰랐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누구보다도 뒷전이었기에 나를 빛나게 해 줄 수 있었다. 우선순위에 해악이 끼칠 것 같은 순간에, 나는 언제나 보석은커녕 개똥보다도 못했다.
물론 내가 뒷전이어서 나를 언제나 집구석 먼지취급하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내가 뒷전인 건 변하지가 않는다. 이건 뭐가 조금 더 나은지 조건을 보아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가 뒷전으로 여겨지는 게 싫다. 견딜 수가 없다. 원래 그랬는지 점점 더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사람으로 성장했다. 뒷전으로 남고 싶지 않은 사람.
챗지피티가 나에게 그런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이론으로 볼 때, 누군가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 경험 때문에 우월감을 추구하게 되고, 또 그러함에 뒷전 인생을 벗어나고 싶어 할 수 있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우월감을 추구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중요하다고 느껴진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주는 것은 세상에 엄마뿐이다. 엄마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뻔뻔하게도 나는 그리 소박하지 않다. 나에게 생명을 주고, 그럼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과 책임감을 느끼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내가 중요할 수 있다니. 태어난 것 빼고는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영향도 없는 사람이라니.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살아보는 의미는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내가 쉬는 숨의 의미를 찾으려고 해 본다. 새벽녘에 뜬금없이 방문을 뻥 차고 들어오는 철없는 8세 강아지 희로에게 나는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역시 뒷전이다. 맛있는 것을 이길 수가 없다. 나에게 자식은 없지만 내가 자식이다. 부모님이 나의 삶의 우선순위라고 도저히 말 못 한다. 그러니 자식에게도 역시 나는 대부분의 시간 뒷전일 것이다.
내가 뭘 아무리 잘한다 해도, 그 어떤 누가 내 옆에 머문다 해도 결국 나는 뒷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 자신뿐이기에 나는 세상에 대고 끊임없이 뭐라고 중얼거린다. 듣거나 말거나 내 할 말을 한다. 어떻게 하면 잘 들어줄까 고민도 해본다. 누구 하나에게도 최우선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다수에게 뒷전이 되고 싶다. 알아야 뒷좌석이라도 준다. 모르면 좌석이 없다. 박리다매. 양으로 채워보자.
이러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남은 채 별먼지가 되어 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떠들 만큼 떠들다 죽었으니까. 반 고흐나 에밀리 디킨슨처럼 평생토록 뒷전 인생을 살다 사후에 인정받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면 평범한 바보가 최선을 다해 욕심을 채운 인생이지만, 알고 보니 천재였는데 나는 그걸 알지도 못했다면 내 인생이 너무 가련하니까.
오늘도 뒷전이라 이룬 게 없지만, 또한 오늘도 뒷전인 것이 서러워 열심히 글을 쓴다. 또 뭔가 할 이야기를 찾아 꿈지럭 대겠지. 뒷전인 내 인생은 일평생의 억울함이자 끝없는 발버둥의 연료가 되겠지. 그렇게 나는 계속 불행과 고통을 술안주로 씹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