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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Apr 26. 2023

욕망하는 이방인들의 도시, 뉴욕. [2/2]

이방인을 품어주는 이방인이 되기 위하여.

속내를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기에, 아무도 나를 잘 몰랐다. 나는 복잡한 뉴욕 거리 풍경에 차분하게 섞인, 눈길을 사로잡지만 사진으로 남길 정도는 아닌 이름 모를 가로수 한그루가 되었고, 그렇게 지내는 것은 지극히 평화롭고 자유로웠다. 그 평화와 자유는 이방인의 특권이자 필연적인 외로움의 근거였다. 헤어짐이 싫어 멀리 하는 것. 아무도 믿지 않는 것. 입 안에 물면 금방 사라지는 달콤한 휘핑크림처럼 그 순간에만 유의미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 우울의 화살 끝이 나를 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작은 방패로 얼굴만 겨우 가리고는 다치지 않을 거라 안심하는 천진함. 이 모든 것이 익숙하여 그럭저럭 평온하게 지냈다. 


그런 나를 매일같이 찾아오던 고양이들이 몇 마리 있었다. 지금 새로 돋고 있는 나뭇잎은 몇 잎 정도 인지, 오늘 몇 잎이나 땅에 떨어졌는지, 내일 날씨는 어떻기를 기대하는지 알고 싶어 했고, 대답을 머뭇대도 집요하게 묻고 관찰했다. 바람이 불면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바쁜 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내었다. 그 빤한 눈빛으로 나는 그럴 가치가 있는 나무라고 말해주었다. 유별나다 생각하면서도 기뻐서 웃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나뭇잎 숫자를 세어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 어느 날 홀연히, 모두 떠났다. 아침 내내 시원하게 비가 내린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유난히 고단한 일뿐이었다. 태풍이 심해 큰 가지가 몇 개 부러졌다. 근처에 다른 나무는 끔찍하게 허리가 꺾여 쓰러졌으니 크게 불평하기엔 눈치가 보였지만, 대책 없이 아픈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매일 울었다. 지나가는 강아지들은 늘 그렇듯 내 몸에 오줌을 갈겨대었고, 아이들은 나를 향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을 자꾸 던졌다. 제정신이 아닌 성인남녀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쓰레기는 또 왜 그리 많이 버리고 가던지. 씹던 껌은 왜 나에게 붙이는지. 


아무리 평화로워봐야 나는 무인도가 아니라 뉴욕의 가로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하늘의 친절한 충고일까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뉴욕은 치열하고 역동적인 도시. 정체된 가로수로 지루하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려운 곳.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다. 이제 어쩌나 하며 바람이 잦아드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진지한 얼굴로 땅에 떨어진 내 나뭇잎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몇 잎인지 알면 부러져 아픈 곳을 치료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아픔이 멈춘 나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정말로 오랜만에,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새벽의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뉴욕의 동력은 인간의 욕망. 뉴요커라면 모름지기 욕망해야 한다. 고통과 짜증, 권태가 나를 짓누른다 해도. 


그렇다면 나의 욕망의 동력은 무엇일까. 나에게 망토를 다시 입힌 것은 어느 순간 희미하게 지워진 나의 꿈과 열정도, 돈이나 명예 같은 보상도 아니었다. 나의 존재가치에, 그리고 행복할 이유에 조건을 달지 않는 선한 관심, 친절한 고양이였다. 품 안의 고양이 덕에 잃었던 여유가 생겼다. 나는 보답하기 위해 도약하고, 그렇기에 용감하다. 모두가 결국엔 떠나버릴지라도, 심지어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오늘 나의 진심을 전달하는 것을 포기하는 일은 그만두자 생각했다. 내일이 없다는 걸 알아도 주저 없이 마음을 열어 이방인을 품어주는 이방인이 되기 위하여. 


괜찮다. 맨해튼은 언제든 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어 줄 것이고, 나는 고양이와 언제든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눌 테니. 




- 전편을 보시려면 편하게 링크 이용해 주세요: 욕망하는 이방인들의 도시, 뉴욕.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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