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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Apr 30. 2023

나의 온도에 맞는 감성으로 사는 것.

하늘의 별을 딸 수 있도록.


사람은 모두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내는 일상의 온도가 있다. 나의 경우 기분 좋게 따뜻하지만 때로는 차갑다. 끓는 물을 식히려 부은 찬 물이 미처 다 골고루 섞이지 않은 곳에서 가장 자연스럽다. 유지하기에 까다롭다 보니 나에게 맞지 않는 온도에서 지내는 일이 더 잦았고, 나이를 먹을수록 너무 뜨겁거나 차가운 날이 늘어났다. 여기저기 엉겁결에 스미는 세월 속에서 나는 당혹스럽게도 나의 온도를 잊었고, 그렇게 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문을 찾지 못해 표류했다. 


고집하는 것도 없고, 취향도 없고. 무엇이든 좋아하지만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이방인의 삶에 어울리기도 하고. 그러나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나를 흘려 넣는 일상이란 기반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지라,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고집스럽게 지켜나가는 나만의 일과가 있는 사람, 좋은 톤의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철없고 부산한 나에게 디딜 곳을 만들어줄 수 있을 테니.  


날 맑은 봄날의 오후, 카메라와 책, 연습장과 작은 필통을 챙겨 나와 뉴욕 웨스트 빌리지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목적 없는 산책을 해보기로 했다. 스스로의 기분에 충실하던 시절, 나는 분명 이런 것들을 좋아했었다. 


속눈썹 위에 내려앉은 옛 기억 속에서 캐낸 나의 세계, 여기서 나는 훌륭한 사냥꾼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봄날 사냥터로 나가 주변을 쉴 틈 없이 탐색하고 관찰한다. 그러다 마음을 울리는 사냥감을 발견하면, 신중하고 신속하게 카메라를 겨누어 렌즈로 담아낸다. 현실에서의 사냥이 지루해지면 책을 펼쳐 저 너머 다른 세상의 문장을 사냥한다. 카메라 셔터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흩어져 날아가던 꽃가루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이 세계의 은밀한 꿈과 지난날의 한숨까지 연습장에 소중하게 새겨 넣는다. 


뭐, 완벽할 수는 없다. 망망대해를 헤매는 것이 본의 아니게 익숙한, 모험을 좋아하는 이방인이지만, 길눈이 많이 어두운지라 새로운 환경에 홀로 발을 들이는 것이 유난히 어렵다. 수십, 수백 번을 간 곳도 처음 가는 곳 같고, 걷고 있는 길도 헷갈려하기 일쑤다. 수시로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해야 하기에 영 모양 빠지는 산책이 될 때가 잦다. 오늘도 막상 정해진 동선도 없이 낯선 곳을 돌아다니려니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내 딴엔 커다란 난관에 봉착할 때에는, 예전에 어머니께서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녀봐야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 있어. 다 그렇게 하는 거야."라고 해주신 말씀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보곤 한다. 다 그렇게 하니까 분명 나도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마음에 드는 피부미용실을 찾으려면 일단 이곳저곳 가봐야 한다는 맥락이었지만, 원래 진리는 작은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법. 일단 지하철역에서 나와 발길 닿는 대로 방향을 틀었다. 


여러 종의 화려한 튤립들, 만개한 봄꽃나무들이 바깥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도심의 작은 정원, 제퍼슨 마켓 가든(Jefferson Market Garden)을 발견했다. 지하철역 근처인 데다 무척 눈에 띄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분명 수십 번은 지나쳤을 테지만, 길치인 나에겐 오늘 발견했다는 표현이 옳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에 홀린 듯 정원 안에 들어가 방문객을 위해 터놓은 길을 천천히 걸었다. 열대우림의 앵무와 잉꼬가 떠오르는 강렬한 색상의 꽃들이 다채롭고 풍성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새들이 사는 곳에 봄이 온다면 이런 정원이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한껏 멋을 부린 희귀 동물들이 진지한 얼굴로 지구온난화를 다룬 책을 읽거나 어젯밤에 본 달무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겠지.  


왜일까. 열대우림의 봄을 만나고 나니,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세월이 느껴지는 작은 서점에 들어가 시집과 에세이를 한 권씩 구입했다. 보기 좋게 진열해 놓은 책들 중엔 동양인 작가의 작품들이 꽤 많이 보였다. 나의 이야기도 언젠가 이 서점에 진열될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니, 앞뒤 없이 용감한 내 모습이 참 한결같다 싶어 낯 부끄러우면서도, 두근거렸다. 문득 한국에서 먹었던 벌집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벌집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밀크셰이크를 밥대신 사들고 그날을 회상했다. 휘핑크림이 입 안에서 순식간에 사라질 때마다 슬프면서도 행복했다. 늘 부드럽고 따뜻하고 달콤하기에.  


거리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조금 더 걷다 보니, 민망하게도 존재를 전혀 몰랐던 공공 도서관이 있었다. 매일같이 도서관에 가던 사람이 생각났다. 나라고 도서관에 못 갈 건 또 뭔가 싶어, 쭈볏대며 들어가 앉아 보았다. 익숙지 않아 바늘방석이었지만 카페와 달리 조용해서 좋았다. 내가 구독해 놓고 보지 않는 잡지들을 모두 대여해 주고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잡지 구독은 이제 끊는 게 좋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연습장을 펼쳐놓고 한참을 나름대로 집필거리를 끄적거려 보던 중, 여기까지 왔는데 해가 좋은 시간에 근처 공원이자 관광 명소인 워싱턴 스퀘어 파크(Washington Square Park)로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짐을 챙겨 건물을 빠져나왔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들른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공원 전체가 뉴욕의 생동감 넘치고 따뜻한 에너지를 망설임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평일 오후였는데도 불구하고 공원은 사람들로 빼곡하여, <월리를 찾아라>의 월리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면 아무래도 찾을 수 없겠지 생각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개성이 넘쳐 사람 구경만 해도 하루가 훌쩍 지나갈 참이었다. 음악가들은 순백의 공기를 반짝이는 화음으로 투명하게 물들이고 있었고, 상인들은 무명 화가의 닦지 않은 팔레트 같은 가지각색의 물건과 재미를 팔고 있었다. 나는 볕 좋은 분홍 벚꽃나무 밑에 앉아, 서점에서 산 빌리 콜린스(Billy Collins)의 시집을 꺼내어 읽었다. 1988년도에 쓰인 시에 2023년의 봄향기가 배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사랑스러운 봄날의 뉴욕을 만끽했다. 사람으로 가득 찬 공원이 번잡하지 않았다. 원 없이 흩날리는 벚꽃 잎, 악사들의 연주와 함께, 우리는 모두 한없이 취해있었다. 


뉴욕에 처음 도착하여 어린아이처럼 낭만을 쌓아가던 그날들처럼,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누리고 찾는 하루를 보냈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나의 온도에 꼭 맞았다. 나는 계속해서 사냥을 나갈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찾고 좋아하는 것으로 시간을 가득 채울 것이다. 한낮의 사막에서도, 한 밤의 북극에서도 내 세계를 단단히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진화하는 나의 세계의 훌륭한 요리사가 될 것이다. 손수 사냥한 재료들로, 나와 같은 온도에 머무르는 이들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할 나만의 요리를 만들 것이다. 하늘의 별을 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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