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벗'이라는 말을 쓰던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책을 읽다가 ‘벗'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면 오랜 시간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인'이라는 발만 담그고 있는 관계가 아니고, '동료', '동창'과 같은 그저 시간과 장소를 함께 하는 얕은 관계도 아니고, ‘친구'라는 누구라도 지칭할 수 있을 것과 같은 흔한 단어도 아니다. ‘벗’이라는 단어로 부를만한 사람은 ‘친구’라고 부르지만 그보다는 특별한,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진심을 담은 친구이다. 조금은 옛날 말 같고 고리타분한 것 같지만 끈끈한 무언가를 내포한 단어. 그러나 그 고리타분이 담고 있는 직선적인 진지함을 좋아한다.
지금이다. 벚꽃잎이 흩날리는 지금, 벗을 만날 시간.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겨울에는 꼼짝하지 않고 거의 집에만 머무른다. 가끔 외출을 할 일이 생겨도 따뜻한 실내의 아늑함만을 찾곤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앙상한 나뭇가지에 벚꽃이 하나, 둘 톡톡 터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봄이 온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숨을 한번 크게 쉬며 공기 중의 온기를 느끼고는 '어느새 봄이 온건가' 깜짝 놀라게 된다. 나는 잔뜩 움추러들고 얼어있던 몸과 마음을 한숨에 담아 내쉬어 단숨에 떨쳐버리고는 그동안 친구들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 그리고 ‘벚꽃, 벚꽃’ 부르면 연상되는 나의 '벗'들을 떠올린다. 내게 벚꽃은 봄을 알리는 전언이자 나의 그리운 벗들을 만날 시기를 알리는 전령과도 같다.
초록 잎이 나오기도 전 서둘러 꽃을 피어낸 벚꽃은 마치 친구를 만나려고 마음먹고는 아무 준비 없이 발에 슬리퍼 하나만 꿰어 신고 외출에 나선 내 모습을 상상하게도 한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꽃송이들은 자기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해서 친구와 주고받는 이야기들의 폭발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물기를 머금은 초여름 나무의 연둣빛 싱그러움보다는 추위가 막 지나갈 무렵의 건조한 바람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벚꽃이야말로 보고 싶은 친구들을 더 생각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연애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나는 벚꽃을 봐도 떠올릴 이성은 없지만 떠올릴 친구는 여럿이 있다. 그녀들과 보낸 봄날의 장면들은 아직도 선명하게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벚나무와 가까운 자리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서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벚꽃을 친구와 함께 바라보고 있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감각만 열어두어도 충분히 행복했다. 할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떨어지는 꽃잎의 숫자보다 우리가 말하는 단어의 양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또, 하필 왜 벚꽃은 중간고사 기간에 만개하는 건지 시험공부는 포기하고 벚꽃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어 하기도 했었다. 그 싱숭생숭 소란한 마음을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풀곤 했던 것도 생각난다. 우리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은 함께 나누어 먹는 떡볶이가 유일했으니까. 여고를 다니던 시절에는 가까운 남고에서 화려한 벚꽃축제가 열렸는데, 매번 친구들과 가자고 약속을 해놓고는 막상 축제 때에는 부끄러움에 번번이 다른 일을 만들고는 했었다. 그때는 참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봄날을 보냈었나 보다. 그때 남고의 벚꽃축제를 갔다면 떠올릴 이성친구가 한 명쯤은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지금, 친구와 벚나무 아래에서 그때의 이야기들을 끝없이 펼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벚꽃을 바라보고 지난 봄날을 생각하다 보니 이상하도록 몸 어딘가가 간지러운 듯하다. 아니, 마음이 간지러운 건가. 괜히 걷고 싶고, 친구에게 전화도 하고 싶고, 친구와 함께 하염없이 길을 걷고 싶어 진다. 꽃과도 같은 벗, 벗과도 같은 벚꽃.
오늘, 나의 벗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