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의 별명은 '딸기'였다. 주근깨가 있는 얼굴에 시도 때도 없이 붉어지는 나의 얼굴을 보며 동생들이 지어준 것이었다. 내 얼굴은 부끄러울 때나, 즐거울 때나, 기분이 나쁠 때나, 슬플 때나 자꾸만 빨개졌다. 그저 누군가의 시선이 내 얼굴에 꽂히거나 어느 모임자리에서 갑자기 내가 주목을 받으면 어김없이 나의 얼굴은 톡톡 깨가 박혀있는 빨간 딸기가 되어버렸다. 그게 너무 싫어서 중고등학생 시절엔 ‘클린 앤 클리어’나 ‘누크’ 브랜드에서 콤팩트 파우더처럼 나온, 그 당시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고체 베이비파우더를 내 얼굴에 톡톡톡 발라대곤 했다. 빨개지는 얼굴을 완벽히 가리진 못해도 핑크빛으로 중화시켜 그저 소녀의 홍조로만 보이길 바랬다. 그건 나의 바람일 뿐이었지만 마치 조색사가 된 듯 열심히도 발라댔다. 대학생이 되어 화장을 하는 것이 자유로워진 후에는 나의 얼굴색을 가려주는 커버력이 훌륭한 화장품을 얼굴에 넓게 펴서 발랐음은 물론이다.
나의 얼굴을 빨갛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알코올인데, 술은 한잔만 마셔도 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테이블의 술은 나 혼자 마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너무 싫었다. 아무리 마셔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친구들을 보며 '아, 나만 술을 자제 못하고 흐트러져 보이는 못난이'같다는 생각을 하며 창피하기도 했다. 알코올의 세상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는 기능 덕분에 기분은 업되어 있을지라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신은 멀쩡했기에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보는 것이 억울했다. 그런데 참 역설적이게도 알코올은 나의 안면 홍조 증세를 가리는 효과가 탁월했다. 감정의 변화나 나를 보는 주변의 시선에 자꾸 빨개지는 효과를 알코올의 그냥, 막, 무조건 빨개지는 효과가 이긴 것이다. 술자리에서는 얼굴에 나타나는 나의 감정을 감추기에 알코올만 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변화에 따른 홍조를 이기는 알코올의 안면 홍조 기능은 용인할 수 있었다. 나는 술자리에서 그것을 적극 활용했다. 그리고 나는 하필 알코올을 좋아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게 무슨 대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기능이 싫은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기분이 나쁘면 그 얼굴의 붉어짐으로 나의 감정을 온천하에 널리 알렸다. 아무리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관리를 해도 ‘너 또 얼굴 빨개졌어!’라는 말이 들리면 나의 감정 감추기 노력은 금세 무너지곤 했다. 만리장성을 쌓던 중 누군가가 주춧돌 하나를 빼버려서 만리의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과도 같았다.
또한 별 것 아닌 일에도 쉽게 빨개지는 나의 얼굴은 괜히 나의 감정이 부풀려지고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나와의 관계가 얕은 사람이 내 옆을 스쳐갈 때 어색함에 빨개진 나의 얼굴은 '너 저 사람 싫어하는구나.' 혹은 '너 저 사람 좋아하는구나.'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이처럼 얼굴에 너무 드러나기에 나는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변명으로, 어쩌면 실없는 농담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는 고민으로 입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감정이 무뎌지면 나의 안면 홍조 기능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이 기능은 나랑 평생 함께 할 것인지 도무지 헤어져지지 않았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아무도 이것을 귀엽게 봐주지 않을 텐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쉬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마저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현으로 인한 마스크 착용 의무화는 일상에서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게 하였다. 마스크는 내 붉은 마스크를 가리는 가면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치 나의 붉어지는 얼굴을 가리는 메이크업이나 알코올의 색상 커버 효과와도 같은 것이었다. 팬데믹 초반에는 도저히 친근해지지 않던 마스크가 호흡하는 것의 불편함을 이겨내고 화장하는 수고로움을 할 필요가 없다는 해방 효과가 느껴지자 내게 모자나 장갑과도 같은 일종의 의복과도 같은 자리를 차지했다. 나의 붉은 얼굴과 너무도 솔직하게 드러나는 표정은 마스크 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마스크 밖의 세상에서 내 얼굴은 너무도 평안한 듯했다. 특히 가끔 맥주 한두 잔의 낮술을 즐기는 나의 붉은 얼굴을 감추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덥고 습한 날에 길을 걸을 때나 배부르게 먹고 식당에서 나오며 습관적으로 하는 '아, 마스크 벗고 싶다.'라는 입버릇에 상반되게도 마스크 착용의 편안함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마스크의 기능이 감염의 예방 효과보다는 메이크업의 단장 효과로 느껴지거나 가면무도회와 같은 익명성의 효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스크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엮어나가는 데에는 큰 걸림돌이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는 서로의 얼굴 모양을 그저 상상에 맡기게 했고 표정의 변화를 가늠할 수 없도록 했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어 내게 큰 효과를 발휘하는 기능도 감정 자체를 알 수 없다는 역효과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에 어려움을 야기했다. 눈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새로 사귄 친구가 마스크를 내린 얼굴을 처음 보았다. '누구세요?'라는 농담을 하고 친구의 다양한 표정들을 보며 그에게 마음을 사로잡히게 되자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장막이 걷히는 기분이 느껴졌다. 그 친구도 나의 자주 붉어지는 얼굴과 어쩔 줄 모르는 어색한 표정에 친밀함을 느꼈을 거라 짐작해본다. 나는 얼굴을 가린 마스크로 인해 인공의 마스크로 살아가던 이 년여 시간 동안 나의 맨얼굴에 드러나는 내면의 정직함을 편안하게 외면할 수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것을 이루게 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고 친밀감을 쌓아가기에 솔직함만큼 중요한 덕목은 없다. 그리고 점차 지금까지 내게 콤플렉스라 느껴졌던, 자꾸만 붉어지는 얼굴을 처음으로 좋은 마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딸기'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감정은 색깔로 나타나기 때문에 너무 쉽게 타인이 알아채고 가끔은 인간관계에서 손해를 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마스크를 끼고 산 지난 이 년여 간의 경험은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감정의 벽을 쌓는 것의 무위함을 절절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사람들이 감정에 솔직한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마스크를 완벽하게 벗어던지는 날이 오면 '딸기'가 된 내 얼굴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전처럼 어색해하고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솔직한 내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진짜 친구들은 '딸기'가 된 내 모습을 좋아해 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