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T와 N이라는 글쓰기 친구가 두 명 있다. 우리는 1년 전부터 각자 매주 한두 편의 글을 쓰고 그것을 공유한다. 그리고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원대한 목표를 갖고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글 쓰는 것을 즐기고, 나와 타인에 대해 알고, 많이 생각하고, 대화를 하기 위해 글을 쓴다. 이것이 우리의 모임이 무거워지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는 서로의 글을 보면서 비평을 하거나 발전 방향에 대해 토론하는 것보다는 '이번 글 너무 좋다.' '이 부분은 설레어서 좋고 저 부분은 따뜻해서 좋다.', ' 이 부분은 너의 다른 모습에 대해 잘 표현해 주어서 좋다.'와 같은 감상평을 주로 한다. 이로 인해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글쓰기에 대한 용기가 되고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예전부터 책을 읽고 대화를 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쌓인 말과 시간들을 통해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친구의 외모, 취향, 성격, 신념은 물론 좋은 점, 나쁜 점, 아픈 부분, 약한 부분들을 잘 알아서 그녀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섣부른 것이었다. 이것은 그녀들의 일면에 불과했다.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순간에 울고 있었고 상처받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에는 태연했다. 어쩌면 나는 수많은 가지에 달린 잎들 중, 나를 만나고 새롭게 돋아난 몇 장의 잎을 보고 친구의 뿌리까지 알고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글을 읽으며 함께 웃고 울고 분노했다.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는 음성으로 느낄 때보다 문자로 다가오자 훨씬 깊은 감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어와 문장은 기호라기보다는 마음을 전하는 메신저였고 나는 글 속에 흐르는 친구의 상념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의 여러 모습들 역시 그녀들에게 매만져지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작년보다 지금 그녀들을 더 많이 알았고 그때보다 지금 더 그녀들을 사랑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내 친구들을 소개한다.
T
유럽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우리의 배낭여행이 비슷하듯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봐야 하는 여행 일정에 지쳐있었다. 뮌헨이었던가, 야간열차에서 내려 열차 대합실 안의 커피숍에서 강력한 각성효과를 일으킬 진한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난 늘 그렇듯 부드러운 라테를 주문하고 높은 테이블에 커피잔을 올리고 의자에 올라앉아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주문을 하는 바 쪽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고 문화충격에 빠졌다. 커피숍의 바 테이블에 서서 한두 모금에 에스프레소를 모두 마시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을 봤던 것이다. 내게 그 모습이 꼭 정수기 앞에 서서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는 모습으로 보였다. 지금이야 피로를 단숨에 풀고 일상으로 서둘러 돌아가려는 그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으나 15년 전쯤이었으니 왜 저렇게 서두르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의 난 커피는 여유롭게 홀짝거리는 음료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커피의 각성효과를 꾸준하게 누려왔고 나의 에너지를 증폭시켜 주는 그 마력에 빠져있다. 아침의 커피는 내게 활기와 에너지의 다른 말이다. T를 생각하니 15년 전쯤 나를 놀라게 한 에스프레소를 단번에 마신 유럽인이 생각난다.
T는 그런 사람이다. 아침의 에스프레소 같은 사람, 에너지를 삶에 쏟아붓는 사람이다. 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은 더 많다. 생각이 많고 말도 많다. 그녀의 생활은 활기차고 이벤트로 가득하다. 같이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다. 그녀는 옷차림도 생기가 넘친다. 맨투맨 티셔츠에 청스커트 또는 크롭티셔츠에 청바지 또는 트위드 카디건에 짧은 플레어스커트 차림이다. 아담한 키에 단발머리인 귀여운 외모와 생기발랄한 옷차림만으로도 그녀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도전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으로 반짝반짝함이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글을 읽고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서투른 도전을 하기보다는 무언가를 꼭 해내려는 투지가 있는 사람이었고 타인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그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픈 부분이나 약한 부분은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꺼내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으며 혼자 끙끙대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걸 알게 되자 그녀를 떠올리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진지함이나 진득함이 느껴졌다. 커피를 떠올리면 내게는 가장 먼저 각성효과가 떠오르지만 그 못지않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향과 맛의 묵직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우유나 초코, 설탕, 다른 향들을 첨가해도 커피는 변하지 않는 그것만의 무게감이 있다.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강렬함. 그래서 어느 자리에서도 T는 눈에 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강렬함과 무게감으로 어쩌면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도 에스프레소의 효과를 발휘하게 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입에 털어 넣고 활력을 얻어 오늘만 할 수 있는 일을 꼭 해내려는 T가 좋다. 그녀를 보면 나도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이 든다. 그러나 무한한 듯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녀를 바라보다 보면 가끔은 우유를 넣은 카페라테를 마시며 느긋하게 녹아내리는 T를 보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앞자리에는 나와 N이 함께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N
내 취향은 향기로운 차보다는 강렬한 무게감의 커피라고 확고하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른한 오후에는 쓴 커피보다는 차가 좋아졌다. 애프터눈 티타임이 어느새 나의 일상에 들어왔다. 오전의 분주함과 고단함이 물러가고 오후의 노곤함이 몰려오면 쿠키나 케이크를 곁들인 홍차가 생각나곤 한다. 이때의 나의 태도는 지쳐있고 표정은 음영이 짙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이 꼬이고 옷차림은 흐트러졌을지라도 차를 마시는 순간의 여유로 다시금 미소를 찾게 된다.
N은 오후의 차와 같은 사람이다. 아니 오후의 차 마시는 시간과 같은 사람이다. 그녀와 만나는 시간을 떠올려보면 나에겐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오전 내내 완벽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 딱딱한 슈트를 입고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고 나온 그녀가 우리를 만나는 오후에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한두 개쯤 풀고, 땀에 메이크업이 살짝 지워진 모습으로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이다. 실제로 N과 이런 장면의 티타임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미지를 그리게 되는 것은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그녀의 직무 특성상 늘 세련되고 당당해보이는 이미지이지만 우리와 만나는 시간만큼은 편안한 옷차림에 메이크업도 거의 하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꼼꼼하고 무언가를 함이 있어서 완벽해 보이는 N이 우리의 모임에서는 늘 팽팽했던 감정선이 느슨해지고 편안해 보이는 느낌을 준다. 어떤 일을 하건 기획력이 좋고 뭐든 해보고자 하는 사람이라서 곁에서 보고 있으면 게으른 나를 반성하게 하는 N인데 우리 앞에선 의도치 않게 헛방을 보여주거나, 사소한 일처리의 미숙함으로 웃음을 준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내 앞에서 서툰 실수들을 하거나 가벼운 농담을 해 보일 때면 그 사람의 생각지 못한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함께 오후의 나른함을 풀고 있는 티타임의 그녀를 나는 자꾸 떠올린다.
왠지 무던할 것 같았던 그녀였는데 글을 읽다보면 사람과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한번 더 놀라게 된다. N에게는 사랑과 우정과 믿음이 중요한 신념이다. 그래서 사람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진지하고 애틋하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그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다. 그런 마음으로 넉넉하게 베풀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도 많이 돌려받는 그녀를 생각하면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사람에게서 향기가 난다고 해야 할까. 완벽함 속에 녹아있는 그녀의 이런 서툰 모습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른한 오후를 함께 보내며 향기로운 차를 함께 하는 그녀와의 만남을 기다린다.
T와 N과 함께 하는 글쓰기가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