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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범인 Aug 19. 2021

함께 읽는 즐거움

“엄마, 나 논술 학원 보내줘요.”

초등학교 1학년 딸이 어느 날 말했다. 논술 학원이란 단어는 어디에서 듣고 온 건지, 논술 학원이 뭐 하는 곳인지 알고 하는 말인지 궁금했다. 책 읽는 것을 공부처럼 하려고 하는 것일까. 초등학교 1학년부터 독서활동을 학원에서 배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그런 딸에게 말했다.

“거기 가면 책 읽고 공부해야 돼. 난 절대 안 갈 거야.”

그 말을 들으니 논술 학원에 가겠다는 딸도, 논술 학원에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아들도 걱정이 되었다. 아들은 그동안 독서를 공부로 생각했구나. 그래서 책을 읽자고 하면 그렇게 싫어했구나. 아이들에게 물었다.

"책 읽는 게 싫어? 엄마는 책 읽는 것 좋아하는데."

"만화책은 좋은데 엄마가 주는 책은 재미없어요."

"나도 엉덩이 탐정이나 엽기 과학자 프래니 같은 책만 좋아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아이들에게 책 읽는 것에 부담을 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반성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내가 읽던 책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책을 꽤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내 아이들과 같은 나이에는 셜록 홈즈나 괴도 루팽과 같은 탐정소설이나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그때 나는 놀라운 추리력의 셜록 홈즈에게 숭배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고, 루팽은 괴도임에도 불구하고 지적이고 재치 있는 매력 때문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의 독서 취향을 보면 내게 독서란 분명 재미와 오락을 위한 행위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즐거운 독서활동을 하며 책의 세상에 빠지게 되었고 재미를 넘어 지식과 지혜를 얻는 독서를 하게 되었다. 그런 내가 책의 재미를 채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수준 높은 학습동화나 아동판 고전소설을 읽기를 권하고 그로 인한 교육적인 효과가 발현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독서를 하고 독서 후 활동을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고 읽은 후에 책에 대한 수만 가지 생각과 감정들을 느끼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행복한 일인지 아이들도 알 길 바랬다.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을까 고민했다. 아이들이 읽고 싶은 책을 같이 읽고 한 권의 공책에 독서 기록을 하는 것은 어떨까? 공책의 왼쪽 페이지는 엄마의 기록지, 오른쪽은 아이의 기록지로 만들어 서로 느낀 점과 궁금한 점을 써보고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엄마랑 같은 책 읽고 이야기해볼까? 대신 책은 너희들이 골라와."

싫다고 할 줄 알았던 아이들은 의외로 환한 얼굴로 좋다고 한다. 그리고 각자 책을 고르러 책장으로 달려갔다. 딸이 골라온 책은 아동용 명작동화인 '인어공주'. 아들이 골라온 책은 본인의 나이보다 어린아이가 읽을 법한, 한글 바르게 쓰기 교육을 위한 동화인 '박죽이가 잡혀 갔어요'. 책을 바꿔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렇지만 호기롭게 시작한 독서활동의 처음부터 엄마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희들이 고른 책을 재미있게 읽어보자. 처음에는 쉬운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지.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너무나 쉬울 줄 알았던 독서 기록지를 쓰며 나는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인어공주의 삶이 아이에게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 '박죽이가 잡혀 갔어요"에서 박죽이를 잡아간 한글나라 병정들이 한글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호되게 훈련시키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까? 아이들 나이와 맞지 않는 쉬운 책을 골라왔다고 언짢았던 나는 많은 생각을 하느라 독서 기록지를 쓰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나의 나이는 우리 아이들보다 4배쯤 더 많은데 말이다. 나는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려는 엄마의 눈을 버리고 아이들의 눈으로 열심히 책 안의 세상을 탐험했다. 그러자 아이들에게 그냥 책만 읽어주며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보다 그 깊이와 부피가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들 역시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책을 다시 펴보고 이야기를 상기해보기도 하고 기록지에 쓸 단어를 고심해서 고르는 것 같기도 했다. 기록지를 작성하는 아이들의 진지함은 감동적이었다.     


1학년 딸의 독서 노트

-책 제목: 인어공주

* 엄마의 느낀 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마음은 아름답지만 자기 자신을 모두 버리는 것은 나쁘다.

* 딸에게 궁금한 점

-만약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가 글을 배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딸의 답: 편지를 써서 왕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거예요.

* 딸의 느낀 점

인어공주가 왕자를 구했는데 왕자와 결혼을 못해서 슬프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무척 사랑한다.

* 엄마에게 궁금한 점

- 왜 열다섯 살이 되어야 바다 밖을 볼 수 있을까?

엄마의 답: 어린 나이에 위험에 처했을 때 혼자 헤쳐나갈 수 없으니까 인어 나라에서 규칙을 정한 게 아닐까?     

3학년 아들의 독서 노트

-책 제목: 박죽이가 잡혀갔어요.

* 엄마의 느낀 점

글이 없다면 우리의 생각과 지식을 후손에게 올바르게 물려줄 수 없어서 역사나 과학 등을 전달하거나 발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글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바른 자세로 바른 글을 써야겠다.

* 아들에게 궁금한 점

- 잘못 쓴 글씨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잘못 전달된 적이 있는가?

아들의 답: 없다.

* 아들의 느낀 점

세종대왕님이 한글을 만들어주셔서 다행이다. 한자를 쓰는 것은 어렵다.

* 엄마에게 궁금한 점

- 세종대왕님이 훌륭한 것은 한글을 만들었기 때문일 뿐인가?

엄마의 답: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한글을 만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잘 표현했다. 희생이라는 단어는 잘 알지 못해도 인어공주의 마음과 왕자의 마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사랑'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여기에 자신을 모두 버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었다. 반면 아들은 감정표현에 서툴렀다. 박죽이가 한글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쁘다'라고 했고 한글이 있어서 '다행이다'라고만 이야기했다. 나의 질문에는 '없다'라는 단답형의 답을 해서 나를 피식 웃게 했다. 그렇지만 내용에 대한 이해를 잘했고 줄거리 설명은 참 훌륭했다. 나는 아들과 한글의 훌륭함과 바르게 쓰는 것의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세종대왕의 업적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알려 주었다. 숙제가 아닌 우리가 계획하고 진행한 첫 번째 독서 활동치 고는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되었다. 아이들은 예상보다 더 깊이 생각했고 기록지를 쓰는 것에 열심이었다. 나도 아이들과 책으로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다.     


우리는 요즘 즐거운 독서활동을 하며 책과 더 가까워지는 중이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하는 독서 활동을 놀이처럼 생각하고 즐거워했다. 특히 내가 독서 기록지를 쓰며 어려워하자 ‘엄마도 쉽지 않죠?’라는 눈으로 너무 재미있어하는 모습은 나의 눈을 흘기게 만들었다. 이렇게 독서활동을 즐겁게 하다 보면 아이들은 책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빠져서 독서의 즐거움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살아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전달해주는 지식을 전달받아 그것을 활용하고 발전시켜가며 사회적인 교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감정과 경험의 폭을 넓히는 가장 쉽고도 재미있는 활동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문자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들을 스스로 구체화해가며 자연스럽게 생각과 지혜를 넓혀갔으면 좋겠다. 그것은 자신을 제대로 알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과정을 지나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도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관계 속에서도 타인에게 ‘존중'과 '배려'를 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책을 읽고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책을 고르고 읽고 이야기 나눌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조금씩 더 성장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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