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의미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의 첫 40년은 본문을 제공하고, 그다음 30년은 그것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지닌다. 이 주석은 본문에 들어있는 도덕과 온갖 미묘한 맛 말고도 본문의 참된 의미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법을 가르친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중
나는 현재 40대 초반이고 내 삶을 돌아보며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몇 년을 경력단절의 상태로 지내던 나는 최근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호기롭게 노트북 앞에 앉았지만 막상 나에 대한 글을 쓰려다 보니 정말 한 문장도 쓸 것이 없었다. 전문적인 일을 한 것이 아니라서 경력은 보잘것없어 보였고 억지로라도 욱여넣어보려던 '끈기'라는 덕목에 어울릴만한 경험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내가 이루고 해온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그동안은 진지하게 고려해 볼 필요를 못 느끼던 나의 자존감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 느껴진 것은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얼마 전 에세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중 나이의 차이와 인식의 변화에 대한 글을 읽었다. 그중 위의 문장을 보고는 내 인생의 본문을 훑어보게 되었다. 볼수록 하찮게 느껴지는 나의 본문에 어떤 주석을 달아야 할까. 주석이 본문보다 훌륭할 수는 없을 텐데 나의 인생은 그저 그런 볼품없는 한 권의 책으로 끝날 것 같았다. 대하소설도 장편소설도 아닌 단편.
쇼펜하우어가 인생의 분류를 40이라는 나이에 한 것은 내게 의미가 있어 보였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시대에는 40살 이후를 노년으로 가는 시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마흔은 그때와는 다르게 인생의 한복판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마흔 살이라는 나이는 살아온 날들을 정돈하려는 의지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번뇌로 혼란스러운 시기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때는 현재이지만 내게 마흔 살 무렵은 특히 더 어렵고 힘든 때였다. 이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와 세상에 속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 자신과 세상의 간극에 대해 자각하는 시기였다. 아름답게만 보였던 세상은 나의 욕구를 채우기에는 기회가 한정적이었고 사회는 냉정하게만 보였다. 게으르고 낙천적이기만 했던 과거는 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은 살아갈 삶이 아득해서 무너지고, 어느 날은 일부러라도 희망을 갖고 나의 미래를 설계하고, 또 어느 날은 용기 내어 무언가를 도전하곤 했다.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경험을 했지만 나는 아직 그것에 대한 옳은 길을 알지 못한다. 여전히 앞으로 펼쳐질 삶에 대한 두려움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런 번뇌를 거듭하며 마흔이 넘은 지금은 30대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았고, 세상의 시선에 맞추다 보니 하지 못했던 것들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거부했던 것들을 받아들일 아량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마흔이 되자 나는 비로소 세상의 단물 쓴 물을 모두 맛보고 어른이 된 듯한 마음이 들었다.
쇼펜하우어의 문장을 보고 또 한 번 나 자신을 돌아보며 과거를 반성하고 내일의 나를 걱정했다.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그런 생각 후엔 언제나 한 가지 답을 얻는다. '무언가를 지금부터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내게 마흔 살은 질풍노도의 시기보다 더 나를 찾고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성숙한 삶의 자세를 갖고 더 나은 미래의 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