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과 함께 와인을, '테이블 오브 콘텐츠'

by 김범인

분당 미금에 위치한 북카페 '테이블 오브 콘텐츠'. 대로를 벗어나 주택가가 시작되는 골목으로 방향을 꺽으면 건물의 측면에 자리잡은 북카페이다. 입구가 도로쪽으로 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무심히 지나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카페에 우연히 시선이 닿는다면 내 안에서 들려오는 메세지를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들어가고 싶다.'

저녁 시간의 '테이블 오브 콘텐츠'는 더 매력적이었다. 붉은 벽돌의 건물 외관과 어울리는 내부의 나무책장과 책상, 초록색 벽, 그리고 은은한 조명은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해 보였다. 더군다나 책. 책이 있는 공간은 그 어떤 곳이라도 따뜻하고 편안한 아름다움을 품는다. 카페에는 예상외로 책이 많지는 않았다. 나는 책장을 쭉 훑어보았다. 문학으로만 편향된 독서 취향을 갖고 있는 내겐 첫눈에 꽂히는 책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무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에게서 느껴지는 안락함을 느끼며 책을 만지고 펴보고 조금씩 읽어 보았다. 모든 책이 그러하듯 나의 손길과 눈길로 인해 종이 위의 문자들이 기호에서 생각으로 변화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렇게 책들에게서 받는 감각들이 좋아서 책방에 가는 것이 좋다.


이곳은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카페이다. 나는 꼭 책과 와인을 함께 즐기고 싶은 친구와 이곳을 오고 싶었다. 오랫만에 외출한 주말 저녁 '테이블 오브 콘텐츠'에서 두명의 친구를 만났다. 책모임으로 만나게 된 친구 '앵무새'와 '럭키'.

앵무새는 예전에 어떤 스님이 사주를 봐주셨는데 전생에 그녀가 '새'였다고 한다. 말하는 새였어서 이동을 하며 말하는 직업이 잘 맞을 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많이 이동하고 말하는 직업을 갖은 행복한 그녀의 닉네임은 ‘앵무새'이다. 닉네임처럼 ‘앵무새’는 말이 많다. 그녀와 함께 있는 공간은 그녀의 밀도 있는 말로 꽉 채워질 때가 많다. 그 말의 무게가 아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서 같이 하는 시간이 시끄럽다거나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세상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노래하듯 말하는 그녀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져서 나 역시 진지하게 들을 수 밖에 없다. 늘 숨김없이, 자신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녀를 더 잘 알고 싶다고 느껴진다. 늘 바쁜 그녀와는 함께 보낸 시간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생각하면 목소리, 말투, 표정 그리고 그녀의 생각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참 신기하다.

럭키의 닉네임의 의미는 말그대로 '럭키7~'의 느낌이라고 한다. 왠지 그녀가 “럭키쎄븐, 럭키쎄븐, 럭키럭키럭키럭키….”라고 노래를 불러줄 것 같다. 함께 있는 사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는 그녀와 잘 어울리는 닉네임이다. 럭키는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많이 바쁘다. 럭키가 참석하던 예전의 책모임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들에 유쾌해져서 모두들 깔깔 거리며 웃곤 했었다. 요즘 책모임에 그녀가 없으니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나보다 몇살이나 어린 동생이지만 특유의 무심한 듯한 다정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보살핀다. 툭툭 내뱉는 듯하지만 말에서 느껴지는 그녀만의 배려심에 자주 감동한다. 아마도 탁월한 기억력을 갖은 그녀는 타인들 각각의 면면을 잘 살피고 헤아리려는 따스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테이블 오브 콘텐츠’의 한쪽 벽면 모서리를 채운 곡선의 의자와 테이블에 우리는 앉았다. 테이블과 의자의 곡선 때문에 우리는 원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듯하고 우리의 시선은 테이블 너머 원의 중심쯤이 될만한 곳으로 모이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테이블 앞의 거대한 선인장 두개가 우리의 시선이 테이블을 넘어가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테이블 바로 앞에 놓인 대형 선인장은 그 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으면서도 우리와 균형을 이루는 존재감으로 마치 이 자리에 함께하는 또다른 ‘누군가’ 같았다.

공간이 주는 안락함을 느끼며 함께 와인을 마셨다. 술을 즐기기 위해 꾸며진 장소가 아니라서 좋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책이 있었고, 북카페라는 공간의 특성상 소란스럽지 않았고, 특히나 주말 저녁이라서 손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글라스 와인을 주문했다. 치즈와 팬네와 함께. 한잔을 마시고 서로의 요즘 사는 이야기를 했다. 오래 만나지 못했던 탓에 서로의 눈과 표정을 바라보며 이야기 하는 것에 마냥 설레였다. 와인 한잔을 더 마시니 서로의 일상과 생각이 궁금했고 나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싶어졌다.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사람을 함께 험담하고 즐거운 일들에는 소리 높여 웃었다. 글래스로 와인을 주문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보틀로 주문했다. 와인을 마시며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이야기 하고 현실과 이상의 좁힐 수 없는 격차를 논했다. 푸념과 자화자찬, 격려와 애정어린 충고를 넘나드는 대화를 끝없이 이어갈 것 같던 그 밤이 깊어가고 우리의 알콜 게이지도 높아졌다. 카페에는 우리만 남았고 우리의 목소리가 카페에 가득차는 것에 움찔하다가도 책과 와인이 있는 공간에 우리의 사는 이야기를 보태는 것이 나쁠 이유가 있을까하며 그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러나 술을 마시지도 잘 알지도 못한다. 그날의 와인이 어떤 종류의 와인이었는지, 괜찮은 와인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들과 함께 마셨다는 그것만이 중요할 뿐. 나는 알코올이 나의 사고와 감정에 미치는 효과에 중독되어 있다. 긴장이 풀리고 나의 정서와 행동이 고양되는 순간의 쾌감을 즐긴다. 이때 나는 말이 많아진다. 나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쏟아내고 나의 감정을 7배쯤 오버스럽게 표현한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나의 과잉된 감정은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효과를 발휘한다. 나는 그래서 좋은 사람과의 술자리를 좋아한다. 상대방을 향한 소심한 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

이렇게 모든 술이 거의 내게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와인은 약간은 다르다. 와인은 '아무나'와 마시고 싶지 않고 '너'와 마시고 싶다. 술잔을 부딪히지도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지 않아도 좋다. 나와 함께하는 ‘너’와 눈을 맞추고 나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와인이 좋다. 이날의 '테이블 오브 콘텐츠'는 내가 참 좋아하는 '너', 그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었고, 그 공간안의 그녀들과 와인은 그 날을 생각하는 나의 기억 속 가장 멋진 그림이 되었다.


와인에 취한 나는 친구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오늘 이 시간을 꼭 기록하겠다고 이야기 해놓고서 집에 돌아와 너무 하이텐션이었던 나를 부끄러워하며 글 쓰는 것을 미뤄왔다. 그러면서도 친구들과 나눈 공간과 시간, 그리고 서로의 감정들을 곱씹어보며 기억이 지워져가는 것이 아쉬웠다. 누군가와 눈에 보이지 않는 친밀함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 내겐 어려운 일인데 그것은 내게 표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친절이나 환대가 아니라 진심을 보여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이날 나는 소심해서 보여주지 못하던 내 안의 못나고 부끄러운 모습을 알콜의 힘을 빌어 조금은 보여 주었고 그들의 마음을 보통의 날들보다 5배쯤은 깊이 들여다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날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것 같다. 다시 한번 와인을 마시며 그 날처럼 이야기 나눌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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