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B는 올해 20주년을 맞는 오래된 커플이다. 햇수로 9년을 사귀었고 가족이 되어 11년을 함께 산 어쩌면 부모님보다도 더 오래 함께 한 서슴없는 사이이다. B에게 우리의 추억의 음식이 뭐지?라고 물어보니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에이... 너랑 먹는데 뭔가 맛있는 게 있었을 리가..."라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거든!"이라고 대꾸하며 둘 다 웃는다. 우리는 이렇듯 남매처럼 살고 있다. 마치 서로에게 손톱을 세우고, 발차기해가며 커가는 남매처럼. 야생이다.
그렇지만 사실 내게는 기억나는 음식이 있다. '깻잎장아찌 바게트샌드위치'
이것은 퓨전요리의 캡틴급. 이름만 들으면 뭔가 거창한 음식 같지만 사실은 가난한 대학생 시절 방학을 맞아 B와 헤어지기 전 알뜰하게 냉장고를 비워 만들어 배를 채운, 사랑의 힘으로 먹은 음식이다. 내 기억 속 한 컷은 샌드위치를 베어 물던 장면이다. 긴가민가 하는 마음으로 밥상 앞에 마주 앉아 한입 베어 물던 순간.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서 세세한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그 장면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방학을 맞아 헤어질 예정이던 캠퍼스 커플인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연인이 되고 나서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고 몇 달 뒤면 B가 군입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무얼 할까 보다는 함께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친구들과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에 흠뻑 취하고 술에도 취했다. 그리고 아쉬운 우리는 모두 다 함께 자취를 하고 있던 우리 집으로 가서 술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역시 젊은 사람의 크리스마스다웠달까. 한껏 들뜨고 시끄러운 밤이다. 그리고 경건하게 아침에 깨어난 친구들은 라면으로 해장 후 하나둘 우리 집을 떠났고 드디어 B와 둘만 남았다. 저녁에 헤어지기 전까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따뜻한 방바닥에 몸을 지지며 전날의 알코올도, 들뜬 마음도 가라앉히며 보내기로 했다.
우린 가난한 대학생이었고 이미 용돈이 바닥날 시점인 한 달의 후반인 데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용돈마저 전날 밤에 거의 다 써버린 후였다. 배가 슬슬 고파오는데 식당으로 나가서 무얼 사 먹기엔 애매한 주머니 사정에, 취기가 가시지 않은 몸으로 나가기가 귀찮기도 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버려야 할 식재료 몇 개와 반찬 그릇 바닥에 겨우 몇 장 깔려있던 깻잎장아찌와 말라비틀어진 채 몇 조각 남아있는 바게트뿐이다. 난감해하던 그때 자신은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라며 엄청 까다로운 식성을 자랑하는 B가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접시에 바게트를 깔고 깻잎장아찌의 국물을 빵이 촉촉해지도록 버터 바르듯 살짝 바르고 깻잎을 빵 위에 올렸다. 깻잎은 접히는 부분이 있으면 안 된다. 맛이 한 부분으로 쏠리면 안 되니까. 독특한 향과 씁쓸한 맛을 갖고 있는 깻잎이 각종 조미료와 양념으로 수만 가지 맛을 장착하고 민숭맨숭한 바게트 빵과 만나 폭발하는 맛의 조화를 고루 느껴야 한다. 이때 깻잎장아찌는 그야말로 잘 숙성된 치즈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당근과 파와 마늘로 이루어진 양념 조각들은 양상추나 루꼴라처럼 신선한 야채 대용으로 깻잎 위에 올려준다. 그리고 바게트 빵으로 덮어주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하고 신비한 맛을 내는 샌드위치가 완성된다.
우리는 기대하며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리고는... 말라있던 바게트의 딱딱함과 입안을 가득 메우는 간장 베이스의 마늘향 가득한 짠맛에 화들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고는 황당하고도 어쩔 줄 모르는 눈빛 교환을 한다. 생각지 못한 재난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삼켜야 할까 뱉어야 할까 고민하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씰룩이던 코믹한 눈과 코와 입. 그렇지만 우리는 삼켰다. 함께 만든 음식이었고 냉장고를 털어 샌드위치를 만드는 이 과정이 너무 즐거웠으므로. 이 음식을 씹어 삼키는 우리의 이 감정이 어찌 사랑의 힘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날 상을 두고 마주한 우리의 배경인 내 방의 TV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영화를 방영하고 있었고 창밖에는 눈이 왔던 걸로 기억한다. 비록 그 영화가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창밖의 눈이 언제부터 내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그 날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 그 한 컷의 세세한 디테일들은 사진을 보듯 다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샌드위치는 분명히 기억하지만 맛이 없었다. 다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날의 서로를 바라보던 그 눈, 코, 입을 다시 보기 위해 먹어보라면 한 번쯤은 다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B와 나는 함께 살아온 20년 동안 깻잎장아찌 바게트 샌드위치처럼 예상치 못한 재난적 이벤트들을 수도 없이 경험해 왔다. 이 경험들이 쌓이며 사랑과 우정도 차곡차곡 쌓였고 서로에게 포식자로 불리는 야생의 한 복판에서도 치명상을 입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 같다. 딱딱하고 짠 샌드위치를 씹어 삼키는 그 날 어쩌면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과 함께하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맛도 행복하게 즐길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