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급번호-008
나이는 인생의 길이를 재는 숫자이다. 그 숫자에 존경하고 싶은 사람들은 주변에 생각보다 많다.
그들의 경험의 시간들은 수많은 시간 중 하나라며 겸손히 넘기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돋보기 없나요?"
노부부가 손을 잡고 사무실에 들어와 내게 물었다.
"아. 네 여기 있긴 하지만 기본 도수만 있어서 불편하실지 모르겠네요."
일 년에 한 번 사용될까 말까 한 돋보기에 먼지를 털어 건넸다.
어르신은 익숙하게 코끝에 걸쳐 쓰곤 서류요청을 작성하며 말 끝마다 감사함을 표현하셨다.
얼마 전, 어르신과 정반대인 막무가내 민원인이 떠올랐다.
"생기부", "한 장", "빨리"
그가 내게 한 말은 딱 세 단어였다.
떼인 돈 받아가듯 낚아챈 서류를 들고 담아갈 봉투를 달라는 몸짓을 하고 떠나갔던 혈압상승 유발자였다.
그와 정반대로 어르신은 나의 시간에 맞추어주었다.
민원인이 대기하는 시간은 전산등록이 되었다면 출력까지 5분 이내 가능하지만 만약 전산에 없다면 팩스가 오가기 때문에 3시간까지 소요된다.
특히 어르신들이 요청한 서류의 경우 전산화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시간이 걸릴 수 있음에 안내드려도 되려 천천히 하라며 의자에 조용히 착석하였다.
찬바람 때문인지 할머니는 사무실의 온풍기 앞에서도 몸을 떨었다.
할아버지는 차가운 할머니의 손에 정수기의 따스한 물이 담긴 종이컵을 쥐어주셨다.
"어르신, 옆에 있는 차 드셔도 됩니다. 민원인용이라 편하게 드세요."
차가워진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다가 사무실 한편에 사보와 지역 홍보책자를 보곤 그 앞으로 다가섰다.
"이거 읽어도 되나요?"
"네 어르신, 민원인 대기 중 읽으시라 준비해 둔 거라 편히 읽으세요."
할아버지는 활자가 좀 큰 책자 하나를 집어 들곤 할머니 옆에 앉아서 할머니 귓가에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할머니 귓가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치곤 멀리 있는 이까지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일동 그들에게 시선이 닿자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말했다.
"할머니가 귀가 잘 안 들려서 크게 읽어줘야 하는데 방해되나요?"
직원 모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괜찮다고 읽어드리시라 모두 한 입으로 합창을 했다.
할머니는 익숙하게 할아버지의 입가에 귀를 가까이 머리를 기댔고 할아버지도 또박또박 한 자 한 자씩 읽어 내려가셨다.
기다림의 시간, 따스한 물이 식어갈 동안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주셨다.
서류가 완료되고 할아버지는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민원대에 오셨다.
"참 다정하세요. 사모님은 행복하시겠어요."
"책을 참 좋아했거든요. 할머니가 낸 책도 있어요. 잘 팔리진 않았지만... 둘이 작은 출판사를 시작했는데 사기꾼이 많더라고. 몇 번을 망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정신을 놔버리더라고요. 집에 있는 책에 불을 붙이던 날, 말하는 법도 잊어버린 이 사람이 함께 해달라는 신호라는 걸 알았지요. 그 후로는 이렇게 늘 함께라오. 사업해 보겠다고 서로를 볼 시간도 없었는데 그 후로는 매일 함께지요. 이 사람도 나도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오."
할아버지의 아린 인생 이야기가 서류를 건네는 시간 동안 흘러갔다.
"건강하세요."
"고마우이, 꼭 그럴게요. 눈 뜬 채로 꿈꾸고 있는 저 사람을 누구에게 부탁하겠어요. 내가 건강하게 지켜줘야지요."
창밖으로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목의 목도리 사이로 바람이 더는 들어오지 못하게 여며주었다. 바람과 맞설 준비가 되셨는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자리를 바꾸셨다. 바람이 불자 앞에 서서 할아버지의 코트가 망토처럼 휘날렸다.
그들의 지내 온 긴 시간은 모두 알 수 없으나 남겨진 따스함이 지는 저녁노을처럼 깊고 은은하게 하루의 마무리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