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급번호-009
일을 시작하고 '요령'이라는 것을 가능한 사용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요령의 사전적 의미인 '적당히 해 넘기는 잔꾀'는 업무의 빠른 종결을 맺는데 도움도 주지만 다른 이에게 피해나 자신의 실수가 따라붙을 때가 많다.
재주껏 요령 부리는 성격도 못되지만 우직하니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로 얻는 보람만큼 값진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나의 마음이 통할 때 작은 도움에도 감사의 표현을 하고자 하는 이들도 많다.
정이 넘치는 대한민국에서 보답을 하고자 하는 이들로 오가는 실랑이는 생각보다 많이 벌어진다.
외국에서 자녀를 키우다가 국내로 전입시키려는 민원인이 내 앞에서 난처하게 서 있었다.
필요한 서류도 처리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 한 채, 무엇부터 처리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지 난감해했다.
그냥 돌려보내도 될 일이다.
좀 더 알아보고 다시 오라고 안내해도 될 일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제출처에서 요구하는 요청서류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한참을 통화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필요하신 서류가 어떻게 되시는 걸까요?"
"그게... 그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처음 듣는 단어이기도 하고 제가 외국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어려운 단어라 전해드리기 어려운데 어떤 것만 준비하라 하며 끊네요."
접수처에서도 여유 있게 도움을 줄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통화 중 급히 적어 내려간 글씨의 다급함이 보였지만 내가 직접 통화한 내용이 아닌지라 어떤 서류를 요구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잠시 제가 통화해도 될까요? 그쪽 담당자와 통화 중이시면 저 바꿔주실래요?"
민원인은 통화하고 있던 상대방에 잠시 양해를 구한 후 내게 전화를 건넸다.
이렇게 복잡하니 알 수가 없지.
나도 알 수 없는 서류도 많았다. 제출처에 어디서 발급 가능한지까지 모두 확인을 마쳤다.
"저희가 도와 드릴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이 있네요. 우선 이쪽에서 도와드릴 부분인 학적 쪽 문제가 좀 걸려있어서 바로 처리는 어려울 것 같은데 기다리시겠어요? 아니시면 제가 드리는 서류도 준비하셔야 하니 저희 건너편에 있는 행정복지센터에 잠시 들르셔서 나머지 서류 발급받아 오셔도 될 것 같네요. 저희 쪽 서류가 발급 완료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감사의 인사를 하며 시간이 촉박하여 남은 서류를 떼러 간다며 급히 사무실을 나갔다.
이젠 내 일의 시작이다. 필요한 서류를 빠짐없이 출력하고 발급 처리를 시작하였다. 전산등록도 요청하며 진행을 하니 30분 정도 소요가 되었다.
"민원인이 요청하신 서류가 발급되었습니다. 저희 업무시간 내 방문하셔서 교부받아 가세요."
전화를 남기고 제법 두꺼운 서류를 정비하는데 어제 먹은 마라탕이 뱃속에서 꿈틀거렸다.
맵찔이 주제에 매운맛의 카타르시스를 느껴본답시고 허세를 부렸더니 뱃속이 용서치 않고 응징을 가해왔다.
"아흑. 사회복무요원님. 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혹시 아까 본 민원인이 오시면 저 봉투 안에 서류 좀 부탁.. 으윽... 부탁해."
오전부터 배를 움켜쥐고 들락거리는 모습에 익숙한지 사회복무요원은 힘내라며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복통만 아니면 응원 동작을 하며 놀리는 모습에 맞받아쳤을 만도 하지만 난 비상사태였다.
마지막 화장실 부름이길 기도하며 종종걸음으로 화장실로 내달렸다.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자리에 서류봉투가 보이지 않았다.
"오셨다가 가셨어요."
과정 설명 없이 결과만 이야기해 주는 사회복무요원의 말에 다행이다 생각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책상 위에 딸기우유 6팩들이 상자가 보였다.
"이건 뭐니?"
"아까 그 민원인이 고맙다고 전해달라시면서 떠나셨어요."
"뭐라?"
우유팩을 집어 들었다. 뱃속이 또 요동치려 했지만 민원인을 잡아야 했다. 화장실로 종종걸음 가던 보폭이 초인적인 힘으로 방방 뛰기 시작했다.
이미 주차장에는 민원인의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여 민원인이 기재한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감사해서 사무실 분들끼리 드시라고 작은 걸로 전해드린 거예요."
"아닙니다. 어디서든 도와주셨을 거예요. 저희 일이거든요. 신청서에 보니 주소지가 저희 집 근처신데 제가 가는 길에 경비실에 맡겨두겠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 받지 않는다는 걸 인터넷에서 읽었어요. 그래서 얼마 안 되는 걸로 골라간 건데, 서운하네요."
"생각해 주신 것만으로 너무 감사한걸요. 다음에 또 필요하시면 부담 갖지 말고 방문하세요."
퇴근시간이 되고 귀갓길에 민원인 주소지의 경비실에 우유팩을 전해두었다. 포스트잇을 미리 붙여두었다.
나름 생각하고 전해주신 마음인데 거절하는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아파트 경비요원은 우유라고 차가운 냉장고에 맡아두는 센스를 발휘해 주셨고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잊고 있던 배탈이 경비실 냉장고 찬 냉기에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바지에 오줌을 싸고 운 때가 언제 적인데 평생 잊지 못할 실수를 할까 싶어서 엑셀의 힘을 주었다.
며칠 후, 탈 난 장은 말끔히 나았지만 교통 벌금고지서가 도착했다.
신호위반. 하하하. 비싼 딸기우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