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급번호-011
나의 아버지보다 연배가 높아 보이는 어르신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헝클어진 은발을 주름 가득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머뭇거리는 모습이 숫기 많은 아이 같아 보였다.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드려야 했다. 밝게 인사와 함께 내 자리 근처로 이끌어왔다.
"봉사 확인서가 필요하다오"
말 그대로 근로자가 아닌 봉사자의 경우 경력으로 인정은 안되지만, 다른 기관에서 봉사자 모집 시 봉사 이력을 제시하여 서류전형에 도움을 받을 만한 간단한 약식 양식 중 하나이다.
"어르신, 서류드리기 전에 사업담당자에게 진위 확인을 해야 해서 조금 걸릴 것 같아요. 물이나 커피 드실래요?"
"물은 무슨, 처자 고마워."
어르신을 위해 손가락에 부스터를 달고 서류 발급을 마쳤다.
"서류 여기 있어요. 이거 가지고 가시면 되세요."
"아이고 벌써? 고맙네. 얼마 주면 되는가?"
"발급비용은 무료세요."
"공짜여? 아이고 이거 고마워서 어쩐담"
어르신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과한 인사를 하였다. 사무실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르신은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며 다시 돌아왔다.
"이 서류를 떼어왔는데 거기로 보내라는 건가요? 아.. 아...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아.. 아.."
어르신은 휴대전화를 잠시 내려놓고선 난처한 상황을 설명하셨다.
"내가 지원 처리를 받을 일이 있는데 마지막 내야 하는 곳으로 이 서류를 보내라는데. 그 팩스인가 뭔가로 보내라는데..."
"제가 그분과 통화해 봐도 될까요? 어르신 전화기 저 줘보세요."
전화기를 양해를 구해 통화를 시작했다.
어르신이 제출하려는 제출처에서 다른 곳으로 서류를 넘겨야 하는데 직접 보내라 요청하는 것이었다. 담당자가 보내도 될 일 같은데 왜 어르신에게 요청하는 걸까?
"여보세요. 이걸 왜 이 어르신께서 팩스로 보내셔야 하는 거죠?"
"꼭 누가 보내란 규정은 없어요. 어렵다고 하시면 어차피 여기 오셔야 하니 오셔서 내시라고 전해주세요."
떨떠름한 그녀의 음성. 어르신의 난감한 표정이 이해되었다. 나는 왜 갑자기 화가 났을까. 되도록 침착하게 통화를 마쳤다.
"담당자분이 설마 어르신께 어르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어려운 일을 부탁하실리 없죠. 꼭 마무리는 담당자분이 잘 처리 부탁드려요."
내가 치밀어 오르던 화의 원인이 떠올랐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일개미였다.
365일 쉬는 날 없이 일만 주어진다면 어디든 몸을 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나처럼 너희는 한 끼라도 배곯지 않게 하겠다는 딱 하나의 이유였다.
그런 아버지의 긴 직장생활을 정년퇴임으로 마치자 곧장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도 직장 생활할 때는 전문분야의 일을 하셨지만 퇴임 후 아무 곳에서도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쉬면 몸이 아프다며 퇴직 후 노년에 다시 뛰어든 직업이 경비원이었다.
그렇게 말해야 자식들이 그만두고 좀 쉬라는 핀잔과 끼니마다 먹어야 할 많은 약값과 생활비를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고 해결해 내는 구실이었을 것이다.
자식에게 해준 것도 없다며 손 벌리지 않겠다는 완강한 고집 앞에 새로 얻은 직장에서 그만두라 할 때까지는 다니고 싶다 했다.
편하다고 했고, 아파트 주민이 너무 잘해준다고 했다.
노파심에 잠시 몰래 들여다보면 아버지 말대로 주민들이 간식이나 손수 만든 음식도 챙겨다 주고, 인사도 정답게 오가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의 퇴근시간에 맞춰 기다렸다가 깜짝 선물처럼 오지 말라 하던 아버지의 일터에 불쑥 찾아갔다.
순간 아버지는 나에게 '잘해주는 젊은 부녀회장'이라 일컫던 이를 어두워진 시력 탓에 잘못 인식했던 모양이다.
나에게 아버지는 90도에 가까운 인사를 했다.
"부녀회장님, 그 불편하시다던 음식물 쓰레기통 앞 정리와 댁 앞에 택배 가져다 드렸습니다."
대답 없이 눈물만 흘리는 나를 보고 그제야 딸임을 알고 아버지는 당황스러웠는지 다급하게 본심이 말을 뱉으셨다.
"아야. 네가 왔구나.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왔니. 아. 그 부녀회장이. 워낙 젊은 여자가 사나워서 요구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재계약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고 해서 맞춰주느라 그런 거야. 괜찮아."
떨떠름한 직원의 목소리로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어르신이 내게 묻는 말은 나의 아버지의 그때 모습 같았다.
"괜찮겠지요? 이걸로 다음 일 하는데 안 시켜주지는 않겠지요?"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어르신의 걱정에 마음 끝이 아려왔다.
우리도 나이 먹는다.
인생의 부메랑이 나이를 싣고 돌아왔을 때의 나이 듦이란 다르지 않음을 잊지 않도록 생각을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