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급번호-012
전설의 고향이란 프로가 한여름 더위를 식혀주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만 빼꼼 나오면서도 끝까지 보던 수많은 이야기 중에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시체의 다리를 잘라 뛰던 아내의 뒤를 좀비처럼 쫓으며 계속 외치던 그 말,
"내다리 내놔. 개다리 내놔."
내 다리 내놔 귀신은 민원업무에도 존재한다.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리고 민원 요청 절차를 물어보는 민원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학생 재학증명서가 필요한데요, 지금 갈 거니까 미리 준비해 주세요."
"죄송하지만 오셔서 민원신청서를 작성하시고 신분 확인 후 열람 발급이 가능하십니다."
"아휴, 꽉 막혀서는... 우선 제가 주민번호 불러드리고 가서 신청서 쓸 테니 미리 준비해 주시면 되잖아요."
점점 치밀어 올라오는 분노 게이지를 조금 낮추고 다시 설득을 해본다.
"발급 처리 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전산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정상 등록되어 있다면 5분 이내 도움드릴 수 있으니 오셔서 절차대로 진행 도와드리겠습니다."
"5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요? 지금 가고 있는데 바로 받아서 제출해야 하니 이렇게 전화를 하죠."
"오시더래도 우선 신분확인을 해야 해서..."
"뚜뚜..."
와.. 놀라움에 감탄사가 나온다.
대단한 내공의 소유자다. 눈에 가림막을 달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자기 하고픈 말만 속도를 낸다.
이런 이들은 말은 이렇게 하고 바로 사무실 문을 열지 않는다.
아마도... 퇴근 무렵이 되면 도착하겠지?
나의 예상은 이제 제법 높은 확률을 자랑한다.
업무의 마무리가 되어갈 즈음 문을 열고 경주마가 들어선다.
"아까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빨리 그 신청서인가 뭔가 그거 주세요."
"본인 내용을 확인해야 하는데 신분증 가지고 오셨죠?"
경주마의 눈꺼풀이 한껏 올라간다.
"꼭 보여줘야 해요?"
"저희에게도 절차가 있고 신분확인 절차는 그중에서도 개인정보 보호에 중요한 내용입니다. 본인의 정보를 보호해 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의 단호함에도 경주마 중에서도 상위권의 경주마에겐 타협이란 없다.
높은 테이블 너머로 신분증을 던지듯 올려놨다. 작성 서류와 빠른 대조를 마치고 신분증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확인이 다 되었으니 챙겨두라 말을 전했다.
서류 발급을 위해 프로그램을 구동시키고 작업을 진행했다. 작성하는 데는 그리 큰 어려움은 없지만 출력하는 프린터로 정보 송신이 빨리 진행되지 않아 조금 시간이 지체되었다.
나와 마주 보는 높은 테이블에 서서 내 모니터 뒤태를 보며 그녀는 테이블 위에서 손가락 피아노를 친다.
나 들으라고 쳐주나 보다.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이 순서대로 드르륵드르륵 테이블 위를 두드린다.
민원인을 대하며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게 나는 강해졌나 보다.
이럴 때일수록 여유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어차피 지침에도 민원발급은 최장 3시간 이내 발급이고, 개인 환경에 따라 발급 시 시간 차이는 벌어지는 것이고...
그녀에게 을의 반란을 보여줄까 싶다가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얼른 경주마를 보내줘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출력이 완료가 되면 진위여부를 알려주는 도장을 찍어 결재를 받으러 가야 하는데 경주마가 급히 먼저 서류에 손을 뻗으려 한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직 발급 완료 상태도 아닌데 이러시면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고요.'라는 눈빛을 쏘았지만 통하진 않았다.
규정에 맞게 직인을 찍고 서류를 내밀자 낚아채듯 서류를 들고 사무실에서 경주마는 달려 나갔다.
사정이 어쨌든 미리 준비를 하면 좋으련만 본인의 급한 마음을 화풀이하는 것이 화가 난다기보다 헛웃음만 나왔다.
자리에 돌아와 다시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큰 웃음이 터졌다.
사무실 직원들은 불쾌한 민원인을 맞이하고 갑자기 웃는 내가 미쳤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데스크 테이블 위에 경주마의 신분증이 고스란히 놓여있다.
민원 신청서에 작성해 둔 개인 연락처를 확인하고 전화를 눌렀으나 경주마는 또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받지 않는다.
문자 메시지를 남겨준다.
'신분증을 두고 가셨습니다. 저희 업무시간은 XX:XX부터 XX:XX까지 이오니 평일 업무시간에 방문하셔서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마감이 다가오면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라는 걸 믿는 나지만, 좀 미리 준비하든지, 아니면 급히 처리해야 하게 되더라도 조금은 여유를 갖자.
한번 고생할 거 두 번 세 번 고생하게 되면 힘든 건 본인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