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동자

발급번호-021

by stamping ink

'삼척동자'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키가 석 자 밖에 자라지 않은 철 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이지만,

잘 나가는 있는 척, 아는 척, 잘난척하는 사람들을 삼척동자라 부르기도 한다.

내가 겪어본 정반대의 백치미로 편하게 지내려는 삼척동자가 있다.

모르는 척, 못하는 척, 배운 적 없는 척...


둘의 공통점은 능수능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요령이라는 수법을 사용하지만 카이저 소제가 아닌 이상 주변에선 이미 알고 있겠지만...


분기마다 찾아오는 삼척동자가 있다.

그는 이동기간이 되면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어야 하기 때문에 서류를 요청하기 위해 사무실에 찾는다.

삼척동자의 등장과 함께 진실의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속이 편하다. 그의 명연기가 시작된다. 구경해 볼까?


"팩스민원을 요청해야 하는데요, 좀 많아요. 여기서 신청해도 될까요? 발급비는 얼마지요?"

그는 알고 있다. 직접 방문해서 처리해도 되는 서류였고, 발급비는 무료이고, 한 곳에 요청하면 자신의 수고를 덜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묻는다.

"물론 가능하지요. 몇 군데로 요청드리면 될까요?"

"음... 10곳 정도 되네요."

"아. 그럼 신청서 작성해 주시겠어요?"

서류를 내밀면 서류 작성부터 모르쇠 작전을 선 보인다.

"신청서를 쓴 지 오래되어서 다 까먹었네요. 이렇게 쓸까요? 여기에 쓸까요?"

거의 도움을 받아 받아쓰다시피 하며 신청서를 작성하고 보낼 곳의 연락처나 팩스번호 또한 '나 몰라'로 일관한다.


요청할 곳의 연락처는 해당부서 홈페이지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고 나 역시도 그렇게 찾아낸다.

그는 그 방법을 뻔히 알지만 본인이 적어 놓지 않으면 담당자가 적어 준다는 걸 이미 알고 공란으로 남겨둔다.

물론 연락처를 적어주는 것이 필수 사항은 아니지만 그는 분기마다 출력을 해가거니와 이미 연락처를 알고 있지만 적어주기 싫은 것을 알고 있다.

요청해야 하는 서류의 제출 연락처를 휴대전화 메모로 가득 써 온 것이 슬쩍 보였다.

"어? 연락처 아시네요. 같이 기재해 주시면 발급 진행이 조금 빨라질 것 같아요."

슬쩍 물어보면 뻔한 대답이 나온다.

"이게 맞는 건지 정확히 않아서요. 다시 찾아봐야 하는데 제가 방법을 몰라서 못 찾겠네요."

최신 휴대전화에 고급 어플 기능이 다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아는데도 발뺌이다.

서류를 다 발급받고 나서도 모르쇠로 도움을 요청한다.


"이 근처에 팩스 보내주는 업체가 없어서 그런데 이것 좀 여기로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사거리 건너에 가시면 대형 문구점이 있는데 그곳에서 유료 사용이 가능하실 거예요."

"저 이 근처 안 살아서 길을 잘 모르는데 여기 팩스 한 번만 사용하면 안 될까요?"

그다음은 예상대로 진행된다. 팩스 이용방법을 모르니 보내달라, 팩스가 도착했는지 발송내역 확인을 해달라, 혹시 모르니 복사본 출력을 해달라...

피날레로 서류가 구겨진다며 봉투까지 요청한다.

사무용품으로 남아있는 봉투에 담아 주고 나서야 그가 떠난다.


뻔한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시달림에 피곤이 밀려왔다. 직원 모두 나의 짙어진 다크서클을 인정했다.

잠시 바람을 쐬러 사무실 옆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어디선가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원래 여기저기 다녀야 하는데 한 군데에 찍어서 이것저것 몰라서 그런다며 해달라고 해. 팩스? 그것도 해달라고 해. 뭐? 야. 바보냐. 연락처는 그냥 모른다고 해. 그러면 걔네들이 찾아줘. 그 많은 곳 전화번호를 힘들게 뭐 하러 쓰냐? 그리고 그거 봉투 하나 달라고 해서 우체국 가서 붙이면 금방 끝나."

차 안에서 삼척동자가 요령이랍시고 친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못하는 척, 모르는 척으로 일은 쉬워진다는 열띤 강의가 펼치고 있다.


놀랍지도 배신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간다.


'이번 연기는 너무 식상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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