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

1. 선

by stamping ink

봄기운도 제대로 느끼기 전, 여름이 계절의 문턱을 넘고 있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교정엔 솜사탕처럼 몽글몽글한 벚나무 열매가 붉게 물들어갔고, 교실 창틀 가까이로 뻗은 가지를 당겨 버찌를 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운동장 가득 울려 퍼져갔다.

싱그러운 아이들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채 걷던 한 소녀가 걸음을 옮기다 멈추었다.

멈추어 선 교실 문 앞에 붙여놓은 흔들리는 종이 한 장은 투박한 글귀와 어울리지 않게 바람 따라 살랑거렸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비어있는 자리에 소녀가 시선을 받으며 앉았다. 이내 회의가 시작되었다.

굳은 표정과 어울리는 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오갔다.

소녀와 마주 앉은 중년의 여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흐느끼다 오열하며 울부짖었다.

"위이잉~"

소녀의 눈이 찌푸려졌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고성에 보청기에서 요란한 기계음이 소녀의 귀에 퍼졌다.

보청기에 의지해 작게나마 들리던 소리가 동굴 속 메아리처럼 소리의 진동만 느껴졌다.

삿대질 해대고 흰자를 드러내며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을 보니 이럴 땐 귀가 안 들린다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소녀 옆에 냉정한 얼굴로 앉아있던 남자가 종이 한 귀퉁이에 휘갈긴 글씨를 소녀 쪽으로 조용히 밀었다.

‘수빈 학생. 동요하지 말아요. 난 학폭위 전문 변호사라 수빈 양 끝까지 도와줄 테니 걱정 말아요.’

변호사는 소란한 틈을 타서 수빈에게 다시 종이 하나를 밀었다.

‘돈 요구하는 벌레 같은 사람들이니 조금만 참아요.’

울부짖는 그들의 마음도 단호하게 옆을 지키겠노라 말하는 변호사의 마음도 수빈에게는 닿지 않았다.

수빈은 조용히 창밖의 벚나무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수빈에게 자택 근신 처벌이 내려졌다.

집에서 일주일쯤 보내던 수빈에게 학교에서 보낸 등기가 쥐어졌을 때에서야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학 진행할 때까지는 채 비서가 데려다주는 시골 학교에서 버티고 있어.’

걱정도 감정도 없는 얼음 같은 엄마는 변함없었다.


수빈은 책상 위의 연필꽂이에 손을 뻗었다. 얇고 투명한 문구용 커터 칼이 손에 잡혔다.

“드르륵”

아기자기한 칼집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솟아올랐다.

더 길고 길게 칼을 밀어 햇살에 비추니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오른손이 칼날과 만날 동안 왼손은 자기 할 일이라는 듯이 손목을 위로 돌렸다.

칼끝은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손목에 달라붙었다. 왼쪽 손목에 바이올린 활 움직이듯 선을 그었다. 얇게 그어 내린 선에서는 아주 작은 핏방울들이 몽글 올라왔다.

그제야 칼날에 빼앗긴 정신이 돌아왔다.

바닥에 떨어지는 칼을 뒤로하고 수빈은 하얗고 바스락거리는 침대의 이불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쁘... 아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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