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

4. 멀어짐

by stamping ink

여름 감기에 걸렸다. 짧아진 옷가지들과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열기가 몸속을 맴돌았다.

한여름 감기라는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여름 감기마저 다정히 대해주지 않았다.

수빈은 '괜찮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홀로 병원을 찾았다.


작은 시골 동네에 병원이라고는 빛바랜 흰색 타일이 박힌 박 의원뿐이었다.

무거운 유리문을 힘겹게 밀고 수빈이 병원 로비에 들어섰다.

그 모습을 쳐다보만 보는 파란 카디건을 걸친 간호사를 향해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차가운 눈빛과 어울리는 간호사의 손가락에 이끌리어 진료 접수증을 작성했다.

신경질적인 발걸음의 간호사가 진료실로 잠시 오가는 사이에 누군가 다시 병원 문을 밀고 들어왔다.

“시부럴. 이놈의 문짝은 왜 이리 무겁고 지랄이야.”


간호사가 진료실을 몇 번 들락거리고 나서야 대기석에 앉은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김영숙 님, 이수빈 님 함께 들어가세요.”

“김! 영! 숙! 님! 이! 수! 빈! 님! 들어가시라니까요.”

간호사의 음성이 더 날카로워졌지만 둘 다 미동도 없었다.

간호사는 짜증 섞인 몸짓으로 수빈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진료실 쪽으로 들어 올리고는 들어가라는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놀란 수빈은 허둥대며 일어섰지만 여전히 꿈쩍이지 않는 할머니를 향해 간호사는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김영숙 님!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이년이! 불렀어야 들어가지.”

“이름 불렀잖아요.”

“언제? 니 방뎅이만큼 작게 부르면 누가 알아듣겠냐?”

“할머니! 어서 들어가세요. 점점 목소리만 커져서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간호사를 밀치고 할머니는 수빈이 걸어간 걸음을 따라 진료실로 들어섰다.

의사의 흰머리는 흰색 가운에 흰 바지와 하나처럼 보였고, 그의 앙상한 손가락은 하얀 머리카락의 움직임과 맞춰 조금씩 진동하고 있었다.

'보건실이나 갈걸.' 하고 후회하는 수빈과 마주한 의사는 입을 벌리는 시늉을 했다.

미심쩍은 표정의 수빈에게 철제 책상 위의 빨간 손전등을 딸깍 눌러 수빈의 입안을 비추었다.

당황스러움에 놀라 입을 벌린 채 얼굴을 뒤로 빼는 수빈의 목을 바르작거리지 못하게 부여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손부채질 하듯이 옆에 가 있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수빈은 로봇처럼 지시에 따라 진료용 검은 회전의자 옆으로 벗어났다.

곧이어 서 있던 할머니를 향해 앉아보라 손짓했다.


놀란 수빈과는 달리 할머니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수빈이 내어준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할머니의 불만 가득한 가늘게 뜬 눈과 성난 쳐진 입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찰나, 의사는 입가로 검지 손가락을 붙여 제압했다.

"쉿!"

간결한 동작으로 의사는 할머니의 고개를 돌려 귀속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진료를 마쳤는지 수빈을 쫓아낼 때처럼 손짓을 했다. 벌 받는 아이들처럼 할머니도 수빈 옆에 나란히 섰다.


“둘 다 귀가 안 좋아서 그래. 하나는 귀가 나가서 안 들리고, 하나는 점점 멀어 가는군. 영숙이 너는 저 학생한테 글씨라도 배워둬. 얼마 안 있으면 너도 저 학생처럼 안 들리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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